우울의 적설량

밤이 아침을 수정할 때

by 적적

밤새 눈이 내렸다. 소리가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침전이었다. 소음 대신 표면을 바꾸는 일. 가로등 아래에서 눈은 방향을 잃은 먼지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각도를 정하고 내려앉았다. 바람은 개입하지 않았고, 중력만이 규칙처럼 작동했다. 길 위에 있던 균열과 오염, 전날의 발자국과 포장지의 그림자까지도 눈은 공평하게 덮었다. 덮는다는 말이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들린다면, 대신 잠깐 눕혀 두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도시의 모든 표면이 잠시 눕혀진 밤이었다.


아침의 창문은 밤의 결론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밤이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문장들이 창밖에 남아 있다. 눈은 빛을 반사하지 않는다. 빛을 삼킨다. 그래서 흰색은 밝지 않다. 흰색은 소거의 색이다. 무엇이 있었는지를 묻기보다, 무엇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지를 보여준다. 난간 위의 눈은 손바닥처럼 납작하고, 자동차의 보닛 위에서는 호흡처럼 미세한 율동을 남긴다. 온도는 낮지만, 표면은 아직 따뜻한 기억을 품고 있어 얇은 수증기가 오르내린다. 눈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인도 가장자리에 쌓인 눈에는 계층이 있다. 가장 위는 밤의 마지막 시간, 아직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무균의 층이다. 그 아래에는 고양이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네 개의 점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며, 방향을 바꾸는 지점에서 잠시 흔들린다. 더 아래에는 사람의 신발이 남긴 흔적이 있다. 바닥이 고무인 신발은 눈을 밀어내며 둔탁한 사각형을 남기고, 가죽 구두는 중심만 파고들어 가느다란 타원형을 남긴다. 흔적은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눈은 판단하지 않는다. 흔적을 기록할 뿐이다.



지붕 위의 눈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땅보다 늦게 식고, 땅보다 늦게 녹는다. 기와의 요철을 따라 미세한 음영이 생기고, 그늘진 부분은 아직 밤의 일부처럼 남아 있다. 낙엽이 붙은 곳에서는 눈이 얇아지고, 금속 환기구 주변에서는 원형으로 물길이 생긴다. 물은 눈을 설득한다. 지금은 여기까지면 충분하다고. 눈은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설득에 넘어가는 대신, 서서히 물의 언어로 바뀐다. 상태의 변화는 폭력적이지 않다.



나무 가지 위에 쌓인 눈은 균형을 연습한다. 가지는 눈의 무게를 계산하지 않는다. 다만 버틴다. 버팀의 결과로 어떤 가지는 조금 휘고, 어떤 가지는 부러진다. 부러짐은 실패가 아니다. 그 또한 기록이다. 바람이 지나갈 때, 가지는 눈을 털어내지 않는다. 대신 작은 균열을 만들어 눈이 스스로 떨어지게 한다. 떨어지는 순간의 소리는 아주 작다. 작은 실패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소리다. 도시에서는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어쩌면 우리 저 발자국을 보자마자 저 마음을 이해해 버린지도 모르지.


차가운 공기는 소리를 얇게 만든다. 멀리서 들리는 엔진 소리는 면처럼 펼쳐지고, 발걸음은 분리된 점으로 들린다. 눈 위를 걷는 소리는 바삭거림이 아니라, 미세한 압축이다. 공기가 빠져나가며 나는 소리. 눈은 공기를 품고 있다. 그래서 가볍다. 그래서 잘 무너진다. 무너짐은 눈의 본능이다. 쌓이는 일보다 무너지는 일이 더 잦다. 밤새 쌓였던 것들은 낮 동안 대부분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형태를 바꿀 뿐이다.

창문 유리에 맺힌 성에는 문자처럼 배열된다. 무작위처럼 보이지만, 확대하면 일정한 각도가 반복된다. 자연은 규칙을 숨긴다. 숨겨진 규칙은 발견되는 순간 사라진다. 손으로 유리를 문지르면 성에는 즉시 사라지고, 그 자리에 투명한 얼룩이 남는다. 얼룩은 곧 말라 흔적만 남긴다. 흔적은 늘 그렇듯 완결을 거부한다. 완결은 설명의 영역이고, 흔적은 상태의 영역이다.



눈 위에는 쓰레기가 더 선명해진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담배꽁초, 비닐 조각, 철사 한 토막이 흰 바탕 위에서 도드라진다. 눈은 도덕을 강화한다. 선과 악의 대비가 아니라, 깨끗함과 오염의 대비를. 그러나 눈은 오래 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오염은 눈 속으로 스며들고, 흰색은 회색이 된다. 회색은 타협의 색이다. 도시가 가장 오래 유지하는 색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오늘의 눈을 이야기한다. 얼마나 왔는지, 언제 그쳤는지, 내일은 녹을지. 적설량이라는 말은 수치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상태를 말한다. 숫자는 깊이를 말하지 않는다. 발목까지인지, 종아리까지인지로 나뉘는 경험의 문제다. 같은 양의 눈이라도, 서 있는 사람과 앉아 있는 사람에게 다르게 느껴진다. 우울도 그렇다. 동일한 무게라도, 표면에 따라 다르게 쌓인다. 눈은 표면을 고른다. 우울은 표면을 드러낸다.



골목의 그림자는 눈 위에서 더 짙다. 빛이 흡수된 자리에는 깊이가 생긴다. 그 깊이는 실제로는 얕지만, 시각은 과장한다. 과장은 오해를 낳는다. 오해는 조심성을 요구한다. 미끄러짐은 대개 과신에서 시작된다. 눈 위를 걷는 법은 단순하다. 보폭을 줄이고, 중심을 낮추고, 서두르지 않는 것. 그러나 단순한 법칙일수록 잘 지켜지지 않는다. 도시의 속도는 이런 법칙과 어울리지 않는다.



버스 정류장에는 발자국이 겹쳐 있다. 기다림의 흔적이다. 같은 자리에 오래 서 있었음을 보여주는, 불필요하게 깊어진 자국. 기다림은 무게를 만든다. 그 무게가 눈을 더 단단하게 눌러 얼음으로 바꾼다. 얼음은 눈보다 위험하다. 투명하고, 예측이 어렵다. 예측의 실패는 늘 작은 방심에서 비롯된다. 방심은 대개 익숙함에서 나온다.



상점의 셔터 앞에는 밤새 쌓인 눈이 작은 둔덕을 만들었다. 셔터를 올리는 순간, 눈은 밀려나며 가장자리로 쌓인다. 중심은 비고, 가장자리만 남는다. 중심이 비어 있는 풍경은 늘 불안하다. 그러나 불안은 사라짐의 징후가 아니다. 이동의 징후다. 눈은 중심을 버리고 가장자리에 머문다. 가장자리는 오래 남는다. 그래서 사진에는 늘 가장자리의 눈이 찍힌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눈이 얇다. 사람들이 밟아 녹인 자리에는 물이 고이고, 그 위에 다시 얼음이 생긴다. 층 위에 층이 겹친다. 겹침은 시간의 표시다. 이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다. 발을 보기 위해서다. 고개를 숙인 자세는 생각을 낮춘다. 낮아진 생각은 현실적이 된다. 오늘 같은 날에는 현실적임이 미덕처럼 보인다.



아침의 눈은 단정하고, 정오의 눈은 느슨하다. 가장자리부터 무너진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간격은 일정하지 않다. 불규칙이 규칙처럼 반복된다. 떨어진 물방울은 작은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은 다시 넓어진다. 넓어짐은 의지가 아니라 결과다. 눈은 의지를 갖지 않는다. 그래서 설득 가능하다.



어떤 집의 대문 앞에는 부지런한 눈사람이 있다. 급하게 만든 듯, 눈은 충분히 다져지지 않았다. 얼굴은 대충 그려졌고, 팔은 나뭇가지다. 몇 시간 후면 무너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이런 것을 만든다. 사라질 것을 만드는 행위는 시간에 대한 태도다. 사라짐을 전제로 한 형태. 그 전제는 애초부터 완결을 요구하지 않는다. 상태로 남기를 선택한다.



오늘의 우울은 측정할 수 없다. 다만 쌓였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어제의 표면 위에, 어제의 균열 위에. 눈은 그 균열을 숨기지 않는다. 잠시 가려 둘 뿐이다. 가림은 치유가 아니다. 가림은 시간을 번다. 시간은 때로 충분하다. 때로는 그렇지 않다. 이 판단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해가 기울며 온도가 내려가자, 녹던 눈이 다시 굳는다. 낮의 설득은 철회되고, 밤의 규칙이 돌아온다. 하루가 하나의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은 알고 있다. 낮과 밤은 서로의 문장을 수정한다. 수정된 문장은 더 간결해진다. 간결함은 잔혹하지 않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낼 뿐이다.



저녁의 인도는 더 위험하다. 낮에 녹은 물이 얼어 투명해진다.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미끄럽다. 그래서 조심하라는 말은 늘 뒤늦다. 조심은 미리 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이미 쌓였다. 쌓인 것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다만 발을 디디기 전에 표면을 확인하고, 무게를 나누고, 속도를 늦추는 것. 오늘의 우울도 그렇다. 이미 쌓였다면, 함부로 뛰어들지 말 것. 미끄러짐은 갑작스럽고, 회복은 천천히 온다. 쌓인 눈을 조심하라. 그것은 경고가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대한 설명에 가깝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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