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속도로 걷기.

너에 고통에 떠오른 이유를 알고 있지만,

by 적적

친구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내용의 전화였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책을 손에 쥐고 잠드는 버릇은 여전한 저는 쥐고 있던 책을 놓쳐 바닥으로 떨어지는 진도 0.0003의 지진계에 잡히지 않는 진동이 끝나고 여진으로 깨어나곤 합니다.


그렇게 깨어나고 나면 진원지였던 책의 모서리 부분이 작은 충격으로 뭉뚝해져 있습니다. 진앙지를 벗어나기 위해 잠시 기지개를 켜고 눈을 껌뻑거리며 소파에 고쳐 앉습니다. 책을 쓰는 사람처럼 느리게 오랫동안 책을 읽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차선책으로 밤 산책을 나서지만, 그 이후의 일은 불 보듯 훤합니다.

친구를 만나러 서늘해진 가을밤을 가로지릅니다. 문득 떠오른 사람이 떠올려진 사람을 보러 와야 하는 것 아닌가? 떠올려진 저주를 핸드폰을 들여다볼 때마다 투덜거리며 친구의 집 근처에서 다시 한번 전화를 합니다.

누군가를 바라다볼 때 위에서 아래쪽으로 바라보는 일은 약간의 시차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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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머리,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은 밤의 화장 정성 들인 아이섀도에서 그리고 하늘거리는 소라색 원피스 가느다란 오른쪽 종아리, 흰 운동화 왼쪽 발에 파란색 깁스를 하고 검은색 하블프리.


블라우스를 다림질하다가 떨어진 다리미 끝에 발가락이 놓여 있었다는 것. 아주 느린 재생 화면으로 다리미가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데 그걸 두 눈으로 보며 발등이 깨지겠다고 생각까지 분명했다는데 발을 뺄 수 없었다는 얘기

교차로에서 교통사고가 난 걸 목격한 사람처럼 큰 길가마다 목격자 찾는 플래카드를 보고 사고의 두려움과 공포를 목격자의 시선으로 브리핑을 받습니다.


그래, 불편한 다리로 걸어 다니느라 고생이 하염없겠구나 왜 내가 떠올랐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떠올랐던 내가 너를 보러 온 것도 맞는 것 같은데.


하블프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하늘거리는 원피스와 젖은 머리, 그리고 가을밤의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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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집 근처 호두 파이가 너무 먹고 싶었다는 널 위해 아메리카노 커피를 두 잔, 작은 크기의 호두 파이를 시켰습니다. 두 마리 쥐처럼 파이를 파먹다가 남은 파이를 싸 들고 너보다 조금 앞서 걸으며 집 앞까지 바래다줍니다.


택시를 타고 갔던 길을 걸어서 옵니다.


가을밤이 서늘한 것은 축복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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