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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라현 Sep 04. 2024

92년생 공기방울세탁기

32년 만의 허락

 지난 2월 설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을 때 오래되어 보이는 구형 세탁기가 한대가 마당에 나와 있었다. 가까이 가서 세탁기에 붙어 있는 배지를 확인하고서야 32년 전 내가 엄마에게 주었던 공기방울세탁기였다는 것을 알았다. 작년 추석까지만 해도 엄마 말로는 잘만 돌아간다던 세탁기였다.

 


 

 1992년 10월 어느 일요일 오후, 두 시간 반을 버스를 타고 고향 터미널에 도착했다.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 집에 전화를 걸어 지금 터미널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고 대우전자대리점으로 향했다. 대리점에는 이미 찜해 놓은 공기방울세탁기가 있었다. 제품 카탈록 나와있던 가격을 넘지는 않았다. 조금 여유 있게 현금을 준비했던 터라 값을 지불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대리점 사장은 어린애가 고가의 제품을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을 보고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대리점 용달차에 세탁기를 싣고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슈퍼에 잠시 들러 세탁기용 세재도 샀다. 약 이십여분이 지나 우리 집 마당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사장님과 함께 세탁기를 묶은 고무바를 풀고 있었다. 잠시 후 소란스러운 소리에 엄마와 아빠가 대문 밖으로 나왔다. 예상치도 않은 용달차가 마당에 서있는 것을 본 엄마는 이게 뭐냐고 물었고 내가 세탁기를 사 왔다고 말하자 엄마는 부리나케 화를 내며 역정을 냈다.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사와. 육갑 데지랄하고 있네. 이런 싸가지 없는 놈"

 

 그때 사장님께서는 당황해하는 나를 보더니 "아들이 선물하는 건데 잘 쓰시면 되죠 어머니."라고 한마디 거들고는 서둘러 세탁기 포장박스를 뜯었다. 혹시 제품을 도로 무를지도 모르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발 빠르게 설치장소에 세탁기를 옮기고서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했다. 그리고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아 세탁기 설치를 끝냈다. 사장님은 우리 가족을 불러서 세탁기 전원 버튼 켜고 잘 작동하는지 시운전을 해 보였다. 그리고 엄마에게 세탁기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당시 시골에서 세탁기 보급이 잘 되어있지 않아 세탁기를 사용하는 집은 보기 드물었다. 우리 집 역시 세탁기를 처음 사용해 보는 것이었지만 조작이 단순해 사용방법을 이해하는데 크게 무리는 없었다. 엄마는 대리점 사장님이 알려준 대로 작동을 직접 해 보이고는 작동 순서가 맞는지 여러 번 확인하고서야 대리점 사장님을 떠나보냈다.


"더 이상 뭐라 하지 말고 기왕 사 온 거니까. 잘 써 엄마"

"그려 기왕 사 왔으니까 잘 쓸게. 다음부터 이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어."



 

 그 세탁기는 엄마를 위한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평소 엄마가 힘들게 손빨래를 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특히 추운 겨울철에도 찬물에 손빨래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엄마에게 세탁기를 사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세탁기를 사들고 집에 왔만 예상 밖의 엄마의 반응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이게 이렇게 화날 일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당시 엄마가 화를 낸 것은 상의 한번 없이 지 맘대로 값비싼 세탁기를 사 왔다는 것과 세탁기를 산 그 돈은 어린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임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역정을 낸 것이었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내가 아무리 엄마를 위한 산 세탁기였지만 의도가 어찌하든 당시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정말 싸가지 없는 놈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동안 92년생 세탁기를 내가 직접 사용해 본 기억은 별로 없다. 하기사 가끔 주말을 맞아 집에 내려와서까지 내가 세탁기를 돌릴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세탁기가 무슨 색이었고 디자인은 어떠했는지 정확히 기억을 하지 못했다. 집에서 가끔 잠깐 스쳐 지나가며 '저 세탁기가 아직도 있네 저게 아직도 돌아가긴 해'라는 정도로 기억되는 그저 그런 옛날 세탁기였다.


작년 추석 때  92년생 공기방울세탁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엄마 저 세탁기 아직 잘 돌아가?"

"그럼 잘 돌아가지"

"저게 아직도 돌아간다고? 안 돌아가면 버리고 새거 사유"

"저걸 어떻게 버려 네가 사준 건데"

지금도 잘 돌아간다고는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 세탁기가 실제로 잘 돌아가는지, 언제까지 돌아갔었는지는 엄마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한동안 돌아가지도 않았을 92년생 공기방울세탁기가 우리 집 세탁실에서  32년 간 탁실에 있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기쁜 마음으로 세탁기를 사왔을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작정 역정을 낸 것에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 세탁기를 선물해 준 아들 마음씀씀이에 대한 고마움이 커서였을 것이다.


마침내 엄마는 작년 추석 때 세탁기를 버려도 된다는 내 동의를 구하고서야 32년 만에 그 92년생 세탁기를 마당에 내놔 놓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 한편 자리 잡고 있었던 어린 아들에 대한 마음의 빚도 훌훌 털어 버렸을 것이다.


"안 돌아가면 버리고 새거 사유"

이 말을 왜 진작에 하지 않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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