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만의 허락
지난 2월 설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을 때였다.
마당에 오래되어 보이는 구형 세탁기가 한대가 놓여져 있었다.
가까이 가서 세탁기에 붙어 있는 배지를 확인했다.
『대우 공기방울세탁기 파워』
그 세탁기는 내가 고등학교 때 엄마에게 깜짝 선물했던 대우전자의 공기방울세탁기였다.
엄마에게 그 세탁기를 선물한 날은 일요일날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 집에 전화를 걸어 터미널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고 근처 대우전자대리점으로 향했다.
다행히 대리점에는 이미 찜해 놓은 최신식 세탁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난 지갑에서 돈을 꺼내 대리점 사장님에게 건넸다.
어린 학생이 아무렇지 않게 거금을 건낸 것을 보고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사장님과 함께 대리점 용달차에 세탁기를 싣고 우리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슈퍼에 잠시 들러 세탁기용 세재도 샀다.
약 이십여분 후 우리 집 마당에 도착해 대리점 사장님을 도와 세탁기를 고정한 고무바를 풀고 있었다.
대문앞에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엄마와 아빠가 대문 밖으로 나왔다.
예상치도 않은 용달차가 마당에 서있는 것을 본 엄마와 아빠는 이게 뭐냐고 물었다.
내가 세탁기를 사 왔다고 말하자.
"육갑 데지랄하고 있네.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사와. 싸가지 없는 놈"이라며
엄마는 나에게 부리나케 역정을 내며 야단쳤다.
옆에서 그 모습을 대리점 사장님은 한마디 거들었다.
"아들이 선물하는 건데 잘 쓰시면 되쥬. 어머니."
사장님은 서둘러 세탁기를 용달차에서 내렸다.
분위기상 세탁기를 도로 무를지도 모르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세탁기를 서둘러 수돗가로 옮겼다.
그리고 포장박스를 뜯어내고 세탁기에 호수를 연결하고 콘센트에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았다.
순식간에 세탁기 설치를 끝냈다.
대리점사장님은 세탁기 전원 버튼 켜고 잘 작동하는지 시운전을 해 보였다.
그리고 엄마에게 세탁기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당시 시골에서 세탁기 보급이 잘 되어있지 않아 세탁기를 사용하는 집은 보기 드물었다.
우리 집 역시 세탁기를 처음 사용해 보는 것이었다.
다행히 조작이 단순해 사용법을 이해하는데 크게 무리는 없었다.
엄마는 대리점 사장님이 알려준 대로 작동을 직접 해 보이고였다.
그리고 작동 순서가 맞는지 여러 번 확인하고서야 대리점 사장님을 놓아주었다.
대리점 사장님이 떠난 후 나는 엄마에게 "기왕 아들이 사준 거니까 잘 써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엄마는 "알았어. 다음부터 이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힘들게 손빨래를 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특히 추운 겨울철에는 더 그랬다.
빨래터 찬물에 손빨래하는 엄마를 봐왔기에 돈을 벌면 세탁기를 제일 먼저 사드리고 싶었다.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세탁기를 사서 집에 왔건만 그날 엄마의 예상 밖의 역정에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이게 이렇게 화날 일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그렇게 역정을 낸 이유는 당연했다.
그 비싼 세탁기를 상의 한번 없이 사 왔다는 것은 물론 세탁기를 산 그 돈이 어린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임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역정이 났을 터였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엄마를 위한 깜짝 선물이었지만 내 의도가 어찌하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정말 싸가지 없는 놈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동안 그 세탁기를 내가 직접 사용해 본 기억은 별로 없다.
하기사 한 달에 한번 정도 주말을 맞아 집에 내려왔었기 때문에 굳이 내가 세탁기를 돌릴 일이 없었다.
그래서 오래전 세탁기라서 무슨 색이었고 디자인은 어떠했는지 정확히 기억을 하지 못했다.
집에서 가끔 잠깐 스쳐 지나가며 '저 세탁기가 아직도 있네 저게 아직도 돌아가긴 해'라는 정도로 기억되는 세탁기였다.
작년 추석 때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32살 된 고물 세탁기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난 넌저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저 세탁기 아직 잘 돌아가?"
"그럼 잘 돌아가지."
"저게 아직도 돌아간다고? 안 돌아가면 버리고 새거 사."
"잘 돌아가는 데 왜 버려. 그리고 네가 사준 세탁기를."
지금도 잘 돌아간다고는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 세탁기가 실제로 잘 돌아가는지, 언제까지 돌아갔었는지는 엄마만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침내 그날 엄마는 나에게 버려도 된다는 허락을 맞고 나서야
32년이나 된 공기방울세탁기를 마당밖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엄마는 아마도 그동안 돌아가지도 않았을 고물 세탁기를 버리기 전에 내 허락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32년 된 세탁기를 마당에 내놓으면서 마음 한편에 오랫동안 자리 잡았던 그 어린 아들에 대한 고마움과 안쓰러운 마음의 빚을 훌훌 털어 버렸을 것이다.
왜 진작에 세탁기를 버리라는 말을 일찍 안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