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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라현 Aug 28. 2024

미루나무집

그곳이 그리워지는 계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일요일 오전 늦잠을 자고 있을 때 창문 너머에서 한 아이의 목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창문을 열어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포플러나무아래에서 한 아이가 얼굴을 묻고서  목청껏 외치고 있었다. 숨은 아이들의 머리가 곳곳에 보였다.




 내가 어릴 적에 우리 마을에 접어드는 다리를 건너서 십 여 미터쯤 되는 곳 왼편으로 시골 풍경에 제법 어울리는 마당이 넓은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집 넓은 마당을 드나드는 길목에 아름드리 미루나무 한 그루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그 집을 미루나무집이라고 불렀다. 어느 때 보다도 여름철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미루나무가 만들어주는 시원한 그늘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뙤약볕 푸른 들판에서 땀 흘렸던 어른들에게 그 미루나무아래는 더할 나위 없는 오아시스였다. 바람이 미루나무를 훑고 지나갈 때면 마치 해변가에 온 듯 한 착각을 줄 만큼 나뭇이파리들이 부딪히는 소리는 청량감을 가져다주었다.




“얘들아 노~올~자~.”

 뒷산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메아리를 따라 나온 아이들이 오전부터 삼삼오오 미루나무집 마당으로 모여든다. 하루 중 미루나무집 마당을 먼저 차지하는 것은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이다. 남자애들은 구슬치기로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로 1라운드가 시작되고 고요하던 미루나무집 마당은 소란해진다. 아이들은 점심시간을 맞아 잠시 타임아웃을 갖고 두둑이 배를 채우고서 다시 미루나무집 마당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편을 나누어 땅따먹기와 딱지치기, 목자 치기, 공기놀이로 종목으로 2라운드에 돌입한다. 오후 내내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소란스러웠던 마당에는 어느덧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던 아이들은 마당 한가운데로 모여든다. 그리고 둥그렇게 빙 둘러서고 한 목소리로 “엎어라 젖혀라”를 외친다. 승자들은 하나둘씩 뒤로 빠지기 시작하고 결국 마지막 남은 두 명은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가린다. 승자는 환호를 하며 무리 속으로 들어가고 홀로 그 자리에 남은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미루나무로 향한다. 미루나무에 바짝 다가간 아이는 반들거리는 손도장이 새겨진 자리에 양손을 대고 손등에 얼굴을 묻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3라운드가 시작된다.

술래가 외치는 사이 아이들은 숨을 곳을 찾아 각자 흩어진다. 담벼락이며 대문간, 뒤뜰, 장독대 그리고 마당 앞에 들깨 나무, 수수 나무, 논둑, 도랑 곳곳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인다.

 술래는 열 번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고 천천히 미루나무에서 손을 떼고 뒤를 돌아서서 주변을 죽 둘러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뗀다. 아이들은 어디에선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머리카락이 보일 세라 깊게 자세를 낮춘다. 술래가 그저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치길 고대하지만 그런 기대도 잠시, 술래는 마치 미루나무가 귀띔을 해주기라도 한 듯 꼭꼭 숨어있는 아이들을 단박에 찾아낸다.

 어느덧 해가 지평선에 닿아 하늘을 붉은색으로 물들여지고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이들은 자신의 키보다 큰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각자 집으로 흩어진다. 아이들의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남아있는 미루나무집 마당에 잠시 고요가 찾아온다.

 

 날이 어둑해지고 달이 떠오르는 시각, 미루나무집주인은 돗자리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마당 한가운데에 펼쳐놓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때를 맞춰 달그림자와 함께 어른이들이 미루나무집 마당으로 마실을 나온다. 어른들은 저녁 인사를 나누며 돗자리 위에 하나 둘 빙 둘러앉는다. 그리고 각자 챙겨 온 먹거리도 풀어놓는다.

뜨뜻미지근한 농담으로 시작된 어른들의 대화는 깊어진 밤 만큼이나 깊어져갔다. 중간중간에 웃음보와 탄식이 오가는 사이에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를 풀어낸다. 엄마아빠 손에 이끌려 나온 몇몇의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의 이야기 세상을 이해할 리 만무하다. 그저 먹거리에만 관심이 있을 뿐 어른들의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 사이 아이들의 배는 두둑해진다. 아이들은 돗자리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밤하늘에 별자리 여행을 떠난다. 종일 신나게 뛰어놀았던 그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꿈나라로 빠져든다. 달이 머리 꼭대기에 있을 무렵 아이들은 엄마아빠 품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든다. 혹여 자식의 곤한 잠을 깨울까 싶어 조심스레 품안에 안고서 짧아진 그림자를 앞세워 미루나무집을 서둘러 떠난다. 그리고 미루나무집주인은 돗자리를 걷어 대문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군다.

자정이 지나서야 비로소 미루나무집 마당은 고요를 되찾는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 인가 6학년 때 인가, 그해 가을 어느 날 밤, 밤새 비를 동반한 태풍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다행히 마을에서는 큰 피해를 본 집은 없었다. 하지만 미루나무집 아름드리 미루나무가 태풍에 못 이겨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소식을 듣고 모여든 마을사람은 뿌리를 드러내고 넘어져 있는 미루나무를 보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미루나무집은 우리 마을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랜드마크와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마을사람들과 함께할 것만 같았던 미루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얼마 있지 않아 미루나무집주인이 근처 옆마을로 이사를 가면서 당시 마을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초가집마저 결국 허물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일들을 연이어 맞이해야만 했다.


 지금은 그 옛 미루나무집터에는 벼가 빽빽히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 시골에 내려가면 가끔 형제들과 미루나무집터 앞을 지날 때가 있다. 

'미루나무가 여기쯤 있었나?', '아니야 그 옆으로 다섯 발짝 더 가야 할걸', '뭐야 다들 그 자리를 기억도 못하고 여기잖아 여기' 서로가 자신의 기억이 맞다고 우겨보지만 워낙 오래전 기억이다 보니 누구 하나 그 자리가 미루나무가 서있던 자리라고 장담을 하진 못하지만 그곳에 서있으면 바람에 일렁이는 푸른 벌판 위로 그 옛날 미루나무집 마당 풍경이 신기루처럼 눈앞에 펼쳐지곤 한다. 




 친구를 만나러 서둘러 집을 나섰다. 밖은 매미울음소리가 유난히 요란스러웠고 내리쬐는 볕은 뜨거웠다. 화단을 따라 걸어가는 데 네 명의 아이들이 깔깔대며 요란스럽게 내 앞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런 아이들이 달려가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잠시 후 뒤쪽에서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더운 한 여름날에 뛰어놀았던 그 미루나무집이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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