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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라연 Sep 28. 2024

아빠의 용돈 만원

아빠의 한턱

 중3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관이라는 곳에서 1박을 한 적이 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 면접시험을 보기위해 하루 전날 여관을 잡아야했다. 면접 당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내 바지주머니를 만져보았다. 바지 주머니에 있어야 할 돈이 잡히지 않았다. 주머니에 잘 보관해 두었던 만 원짜리 지폐가 사라지고 없었다. 전날 자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바지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혹시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확인하고 확인을 하고 잠을 잤기 때문에 돈이 없어졌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학창 시절 학용품 살 돈을 제외하고 용돈을 받을 수 있었던 날은 소풍날과 운동회 날 뿐이었다. 그날에는 그저 계란과 빨간색 소시지가 들어간 김밥 한 줄이면 너무나도 행복했다. 평소 잘 먹어보지 못하는 김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풍 전날 엄마는 게 하굣길에 소시지를 사오라며 딱 소시지 사 올 수 있을 만큼만 돈을 주었다. 잔돈이 남지도 않겠지만 혹시 잔돈이 남으면 꼭 가져와야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머지는 군것질을 하라고 해도 할 법도 한데 절대 엄마는 에누리가 없었다. 학교 앞 가게에 들어가 다양한 과자봉지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 다음에야 제일 싼 빨간 소시지 한 개를 집어 들고 가게를 나왔다. 과자는 못 샀지만 소시지 한 개를 사들고 가는 것만도 내게는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때는 그 흔한 과자를 사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집 경제 사정은 팍팍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내가 사고 싶다고 해서 용돈을 달래 보거나 군것질을 하게 용돈을 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당연히 용돈이란 게 없는 집이라고 생각했다.


 중2 때 소풍날 아침 아빠가 준 500원짜리 동전 한 개를 쥐어 주었다. 그동안 200원, 300원을 쥐어준 게 전부였지만 그 소풍날에 역사상 가장 큰 용돈을 받은 날이었다. 나는 친구들처럼 아이스크림과 과자, 음료수를 사 먹고 싶었지만 그 용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집에 가져왔다. 엄마가 맛있게 만들어준 빨간 소시지김밥 한 줄로 만족해야 했다. 내게 음료수를 돈을 주고 사 먹는다는 것은 사치였다. 500원이야 음료수 몇 개 밖에 살 수 없는 작은 돈이었지만 내게는 꽤나 큰돈이었다. 아빠가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준 돈이었지만 부모님이 어렵사리 번 돈을 돈임을 알기에 쉽게 군것질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돈을 쓰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철이 그만큼 빨리 들었거나 그만큼 돈을 쓸 줄 모르는 아이였다.

 소풍 장소는 학교에서 도보로 30분 채 안 되는 성곽유적지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소풍날이 같은 날이었고 소풍장소라곤 대부분 학교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누나는 바로 옆 고등학교에 다녔다. 소풍을 마치고 버스터미널에서 누나를 만났다. 나는 누나를 보자마자 나 돈 안 쓰고 그대로 있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누나는 그런 나에게 뭐라도 사 먹지 그랬어 라며 나도 안 썼어. 누나도 500원을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돈을 가지고 있었다. 누나는 나보다 학년은 2년 높았고 나이는 3살이 많았으니 나보다야 일찍 철이 들었던 것이다. 안 쓴 돈으로 학용품을 사는 데 사용했다.


중학교 입학등록금 낼 돈이 없어서 하마터면 난 중학교 입학도 못할뻔한 일도 있었기 때문에 내게 돈이란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그런 것이었다.




 그날 여관방에는 나 말고 함께 시험 보러 온 9명의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돈이 없어진 걸 확인하고 깨어 있는 친구들에게 혹시 방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봤는지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봤다는 친구는 없었다. 내가 만 원짜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전날 기억을 더듬어보고 여관방을 뒤져 보았지만 끝내 그 만 원짜리 지폐를 찾을 수는 없었다. 심증상 범인은 우리 안에 있었지만 뭐 딱히 증거가 없으니 더 이상 추궁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돈 찾는 걸 포기하고 심란한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학교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어찌 그럭저럭 면접시험을 마쳤다.

하루 종일 그 만 원짜리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만 원짜리는 그냥 돈이 아니었다. 그 만 원짜리는 내가 처음으로 많이 받았던 용돈이었고, 아버지가 고등학교 면접시험 보러 가는 아들에게 힘이 되어주고자 준 용돈이었다. 그야말로 아빠가 생전 처음으로 아들에게 크게 한턱을 쏜 돈이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그만 한 번도 써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돈이면 많은 것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사용 한번 해 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려서 무척이나 억울한 심정이었다.

우선 무엇보다 엄마아빠에게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리려니 혼이 날까 봐 걱정이 앞섰다. 터미널에 도착해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잘 도착했고 곧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가겠다고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 집에 들어가서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리기로 하고 버스를 탔다. 해는 이미 지고 어두웠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마아빠의 역정을 들을 것을 각오하고 집에 들어갔다. 우선 집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하면서 어제 맛있는 것도 먹고 잠도 잘 자고 시험도 치렀다는 얘기를 늘어놓은 다음 마지막으로 머뭇거리다가 어제 아빠가 준 용돈을 잃어버리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얘기했다.

내 말은 듣고는 엄마아빠는 혼을 내는 대신 잃어버린 걸 어쩌겠냐며 니기 어디서 흘렸나 보지. 친구는 의심하지 말고, 앞으로 돈 잘 간수하고 괜찮다는 말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뜻밖의 위로에 하루종일 심란했던 마음을 편안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엄마아빠 입장에서든 나에게든 그 돈은 큰돈이었지만 아들이 그 먼 곳까지 가서 시험을 치르면서 돈을 잃어버린 것에 실망하고 또 엄마아빠에게 혼이 날까 봐 하루종일 얼마나 걱정을 했을지 아들의 마음을 엄마아빠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혼 보다는 위로를 해준 게 아니었까 싶다.




아빠는 9살 때 아버지(할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엄마(할머니)는 아빠가 신혼이었던 20대 후반에 돌아가셨다. 그런 환경 탓에 어렸을 때 너무나 가난을 품고 살았다. 어렸을 때야 그 사실을 듣고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나중에 커서야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왜 그렇게 돈을 쓰는 것에 인색했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런 탓에 우리 형제들은 국민학교때 부터 학창 시절 그 흔한 용돈하나 제대로 받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는 아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돈을 움켜쥘 줄만 알지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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