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단발머리녀 하나

장편소설 스페셜 미드나잇 2부

by 나라연

시간이 흘러 다시 화요일.

나는 하나슈퍼 평상에 앉아 쥐색 정장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주엔 오히려 그가 나보다 먼저 와 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늦었다.


기다리다가 지루함을 달래려 신문을 펼쳤다.

사회면을 훑어보다가 한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르포! 연속기획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시한부 종말론」 휴거 이후, 그들은 지금 어디에?’

휴거 소동 이후의 상황을 다룬 기사인 것 같았다.

막 읽으려던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톡 건드렸다.


그가 온 건가 싶어 신문을 반으로 접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굳었다.


뜻밖에도 그곳엔 2층 미용실의 단발머리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엔 은색 캔음료가 들려 있었고, 캔이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팔은 좀 어때?”
그녀의 첫마디였다.


“팔이요? 아… 괜찮아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팔을 들어 보였다.


그녀는 내 팔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말했다.
“여기, 아직 멍이 있는데?”


팔 돌려 보니, 한 달이 지났는데도 팔꿈치 바깥쪽에 옅은 보랏빛 자국이 남아 있었다.

“멍울이 좀 졌나 봐요. 별건 아니에요.”


그녀는 짧게 숨을 내쉬더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자, 이거. 멍자국 값이야.”


그녀는 음료수를 내밀었다.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받아 들었다.
“네. 그럼… 잘 마실게요.”


미용실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왜 여기엔 어쩐 일이세요?”
“가게 좀 보고 있어.”


가게라면 이곳, 하나슈퍼뿐이었다.


난 손가락으로 하나슈퍼를 가리켰다.

“여기서 아르바이트하세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아르바이트는 무슨, 우리 부모님이 운영하는 슈퍼야. 내가 쉬는 날엔 가게를 봐드려.”

“아… 그렇군요.”

“네가 우리 집에 신문배달해 주는 거였구나.”

“네? 혹시 집이 어디예요?”


그녀는 골목 위쪽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2층집.”


그녀가 말한 곳은 예순다섯 번째 구독자, 이하나의 집이었다.

나는 무심코 간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름이 이하나?”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바로 쉰아홉 번째 구독자 이하나였다.

수금할 때마다 마주쳤던 중년 부부의 딸 이름이 ‘하나’ 일 거라 짐작은 했지만,

그 이하나가 바로 단발머리녀였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그녀는 미용실 휴무일인 화요일에 가끔 어머니와 오전, 오후 교대로 가게를 본다고 했다.


“아, 참. 맞다.”

그녀가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까 오전에 전화가 왔었어. 대신 신문 좀 받아달라고. 너한테 말하면 알 거라던데?”

“안 그래도 왜 안 오나 했어요. 그 아저씨 늦는데요?”
“응, 한 시간쯤 늦을 거라던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 남자와 그녀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그 아저씨랑 잘 아는 사이예요?”

“아니, 그냥 몇 번 물건 사러 온 손님 이랬어. 신문받아달란 것도 엄마한테 전해 들은 거야.”

“그 아저씨 이 동네 사람이 아닌가 봐요?”

“응. 그런가 봐....”

그가 여기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확인 차 물은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그 남자가 가게에 처음 온날, 음료수와 과자를 사면서 엄마한테 이것저것 캐묻더래.”

“뭘요?”

“저 위에 빨간 대문집. 거기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순간, 내 귀가 쫑긋 했다.
“거긴 왜요?”

“누가 사는지, 가족은 몇 명인지… 뭐 그런 걸.”

왜 그런 걸 물어봤던 걸까?

순간, 뭔가 조금 수상쩍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제가 알기로는 그 집에 선생님 부부가 산다고 하던데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집도 우리 신문 구독자거든요.”
“그랬구나. 근데 그 집 사람들 요즘 안 보인다던데… 이사라도 갔는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부터요?”
“글쎄… 10월 말쯤? 원래 일주일에 한 번쯤은 식료품 사러 왔는데, 요즘은 통 안 오신다더라고.”


그 집이 정말 이사를 갔다면, 신문보급소에서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사 갔으면, 동네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잖아요. 분명 이삿짐 차도 왔을 테고.”

“혹시 모르지. 짐을 두고 몸만 떠났다면, 이사 간 걸 누가 알겠어.”


그녀의 말에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씁쓸해졌다.

나 역시 얼마 전에 짐을 다 남겨두고 쫓겨 나오듯 이사를 했던 케이스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괜히 멋쩍게 웃었다.


문득, 지난번 현관 앞에서 봤던 피켓녀와 회색 정장 남자가 떠올랐다.
“그 선생님 부부, 연세가 어떻게 돼요?”
“50대 후반쯤 될 거야.”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은 그 집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녀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근데 너, 왜 그렇게 그 집에 관심이 많아?”

순간, 내가 너무 꼬치꼬치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짧게 숨을 고르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관심이라기보단…”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지난번 신문 배달하다가 우연히 봤는데, 그 집 안에 사람들이 꽤 많더라고요. 그렇게 북적이는 건 처음 봤어요. 분명 선생님 부부 두 분만 산다고 들었는데… 뭔가 좀 이상했어요.”


그녀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엄마 말로는, 한 달 전부터 낯선 사람들이 그 집에 자주 드나든대.”

“어디를요?”

“그 집 말이야. 여기 우리 가게도 마찬가지야. 손님이 늘어서 엄마는 오히려 좋아하시지만…”

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
“어느 날인가 엄마가 밤늦게 가게 문 닫고 집에 가다가, 그 집 대문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나오는 걸 봤대.

그땐 그냥 집안 행사가 있어서 손님이 왔다보다 생각했대.

그런데 며칠 뒤엔 처음 보는 사람 열댓 명이 버스에서 내리더니, 우리 가게에 와서 쌀, 라면, 김치, 찬거리 만들 거랑, 과일, 과자, 휴지 같은 걸 잔뜩 사 갔대.

그래서 엄마가 궁금해서 따라가 골목길을 지켜봤더니… 그 사람들이 그 선생님 댁으로 들어가더래.”


“음.... 좀 이상하긴 하네요.”

“그래서 선생님 부부가 혹시 이사 간 게 아닐까 싶었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전이라면, 휴거 소동이 있은 직후였다.

그날 이후부터 빨간 대문집에 낯선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고, 신문이 날아온 날도, ‘신문사절’ 종이가 붙은 날도, 이상하게 그 시점과 겹쳐 있었다.


그때, 버스가 하나슈퍼 앞에 멈춰 섰다.
여섯 명 남짓한 사람들이 줄을 지어 내렸다.
버스는 잠시 정차하더니, 곧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곧장 슈퍼 쪽으로 향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요, 사람들… 가게로 들어가는데요.”


하나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저 사람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데.”


그녀는 잠시 시선을 머물다, 이내 말을 이었다.
“이만 가게 들어가 볼게.”

“네. 음료수 잘 마실게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참, 머리 자를 때 우리 미용실로 와. 내가 예쁘게 잘라줄게.”


그녀는 신문을 품에 안고 슈퍼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평상에 앉아 그녀가 건넨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달콤한 탄산이 목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음료수를 거의 다 마셔갈 무렵, 슈퍼 문이 열리며 여러 명이 식료품 봉지를 가득 들고 나왔다.

나이대는 제각각이었다. 젊은 사람부터 백발노인까지.

그들은 서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빨간 대문집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는 음료수를 평상 위에 내려놓고, 슈퍼 담벼락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예상대로, 그들은 모두 빨간 대문집안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대로였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뭐지?'



나는 평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남은 음료를 마저 비우고 고개를 들었다.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서걱대는 잎사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저 잠시 눈을 붙인다는 마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무언가가 뺨을 스쳤다.

화들짝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져 있었다.

달빛조차 사라진 하늘 아래, 별빛만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하나슈퍼의 셔터는 반쯤 내려와 있었고, 가게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저 냉장고 불빛만이 가게 안을 밝힐 뿐,

골목도, 거리도,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잠든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머릿속은 멍했고, 몸이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정신을 차리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웠다.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시간은 훌쩍 흘러가 있었다.


주변은 숨을 삼킨 듯 고요했다.
나는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처럼 평상 위에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하얀 빛줄기 하나가 서서히 다가왔다.

곧이어 골목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빠르게 내달리는 발소리, 누군가가 어둠을 헤치며 뛰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골목에서 뛰쳐나왔다.

그의 몸에는 하얀 빛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슈퍼 사거리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빛을 바라봤다.


그 순간, 빛줄기가 십자를 그리며 네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모였다.

그리고 그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는 허공에 떠오른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희뿌연 안개 같은 것에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두 팔을 내 쪽으로 뻗었다.

마치 붙잡아 달라는 듯한 몸짓 같았다.


난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얼굴을 덮고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 빛이 번쩍였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푸른 섬광만이 남았다.


나는 두 팔로 얼굴을 감싸며 평상 위에 주저앉았다.
눈앞엔 아직 그 눈빛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낯설지 않은, 어딘가 익숙한 눈빛이었다.


-따라라라라락, 따라라라라락,따라라라라락.


그때 어디선가 쇳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귀를 사정없이 때리는 쇳소리.

머리맡 자명종이 미친 듯 울어대고 있었다.


아침 7시 30분.

창문으로 쏟아진 햇살이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나는 이불속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사라진 이후, 이상하게도 매번 같은 꿈이 반복됐다.

빛줄기에 갇힌 사람.

그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가 나를 바라보던 찰나의 그 눈빛만큼은… 낯설지 않았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