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쥐색 정장남

장편소설 스페셜 미드나잇 3부

by 나라연

나는 침을 삼키며 TV 화면을 응시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 덥수룩한 수염, 검은 사각 뿔테 안경.
하얀 셔츠에 회색 정장 재킷, 짙은 네이비색 넥타이를 맨 남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몇 주 전, 피켓녀와 함께 현관 밖으로 나왔던 그 남자였다.
그날 그대로의 차림이었다.


화면 속에서 우레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거실에서도 거의 동시에 박수가 일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아멘.”

사람들이 일제히 따라 외쳤다.

설교가 이어지는 동안, 그의 말 한 줄마다 “아멘”이 터졌다.
거의 기계적이었다.

나와 하나도 눈치를 보며 입을 맞췄다.

“아멘.”


내겐 그의 말은 하나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듣기엔 그럴듯했지만, 그럴싸한 위로와 약속으로 포장된 문장들로 가득했다.


영상 속 남자는 두 손을 펼치며 눈을 감았다.
그 손짓은 화면을 뚫고 나올 듯했다.


그가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 종말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택하신 자는 반드시 구름 위로 부르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습니다… 아멘, 아멘…”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숨결도 달아올랐다.
거실 안의 공기가 뜨겁게 일렁였다.


“이 세상은 이미 심판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 문이 열리고, 우리는 모두 그분 곁으로 들려 올라갈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데려가소서!”
“아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일어섰다.
숨이 막힐 듯 답답한 열기 속에서, 나는 화면 속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 톤과 속도는 의심할 여지없는 변사의 언변을 지닌 전형적인 목사의 말투였다.
하지만,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고 과장된 듯한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조금씩 식어가자, 영상 속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성경 구절을 함께 읽고,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이 그와 동시에 성경 구절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설교 초반에 읊던 성경구절이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아멘.”


바로 그때, 짧은 정적을 가르며 ‘삐익… 툭’ 소리가 났다.
캠코더 안의 녹화테이프가 다 돌아가 멈춘 소리였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하나를 봤고, 그녀도 동시에 나를 봤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재빨리 내 무릎 옆에 놓인 진수의 워크맨 이어폰을 잡아 빼고,
그대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삐익.’
짧은 전자음 뒤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 J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J 난 너를 못 잊어 ♪


낯익은 노래와 멜로디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로 쏠렸다.
진수가 놀란 얼굴로 워크맨을 내려다보더니, 급히 집어들고 정지 버튼을 눌렀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수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잘못 눌렀나 봐요.”

사람들이 잠깐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진수는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워크맨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야, 나도 깜짝 놀랐잖아.”
나는 모른 척하며 진수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하나를 쳐다봤다.
하나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곧 천장등이 켜지며 거실이 환해졌다.
쥐색 정장남이 보라색 천으로 덮인 원형 헌금통을 앞줄 바깥쪽 사람에게 건넸다.
그는 안에 지폐를 넣고, 통은 옆으로 전달되었다.


진수가 귀띔했다.
“헌금하는 거야. 강제는 아니니까, 그냥 넘겨도 돼.”

내겐 내고 싶어도 이런 곳에 낼 돈은 없었다.


이어서 감사기도와 축도를 끝으로 예배가 끝났다.

하나가 벽시계를 보고 말했다.

“오영아 나가자. 10시에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있어.”

시계는 9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나는 테이블 위 가방을 들고 슬그머니 일어섰다.

진수가 일어선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따가 시내로 나가는 교회 차가 있어. 그거 같이 타고 가자.”

나는 하나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그냥 버스 타고 갈래.”

“그래, 편한 대로 해.”

“그럼 내일 학교에서 봐.”


하나가 진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다음에 또 봐.”


우린 누구보다 먼저 현관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문을 나섰을 때, 낯선 봉고차 한 대가 담벼락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진수가 말한 교회차였다. 뒤쪽엔 승천교회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휴… 아까는 들키는 줄 알았어요.”
“나도. 심장 멎는 줄 알았지 뭐야. 빨리 여길 벗어나자.”


우리는 하나슈퍼 쪽으로 서둘러 걸었다.


“근데 아까 너, 왜 그렇게 멍하니 있었어?”
하나가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 집 안에… 우리 집 가구들이 있었어요.”
“에이, 설마. 비슷한 가구야 어디 한둘이냐.”
“아니요. 소파 팔걸이에 찍힌 자국까지 똑같았어요.”
“착각한 거 아냐?”
“아까 전도사가 있던 방 있죠? 거기 피아노만 빼면, 아버지 서재에 있던 거랑 똑같았어요.”


하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너네 집에 있던 물건들이라면… 그게 왜 그 집에 있는 걸까?”

“저도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잠시 걸음을 멈춘 나는 낮게 말했다.
“진수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요.”
“무슨 얘기?”
“그 영상 속 목사 말이에요. 진수 말로는, 예전에 진수가 다니던 교회의 장로였대요.”
“그 교회라면, 지난번에 휴거 주장했던 그 교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지방에 있던 땅이랑 집을 교회에 헌납했대요. 재산 전부를.”
“진짜? 그럼 그 사람도 재산 다 뜯긴 거네. 그런데 그게 왜?”
“지난번에도 말했잖아요. 아버지가 사라지고 얼마 안 돼서 우리 집 땅이랑 집이 외지인한테 팔렸다고.”
“아, 맞다. 그 얘기했었지.”
“그 장로라는 사람 나이도 그렇고, 시기도 그렇고... 그 집 가구들까지 보니까 자꾸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혹시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는 한참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
“하지만 영상 속 그 사람, 네 아버지는 아니잖아.”
“네... 그래서 실망했어요. 차라리 아버지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표정엔 연민이 스쳐갔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작년 9월, ‘마지막 집’에서 이삿짐 트럭을 봤다는 선배의 말이었다.


나는 하나에게 물었다.
“전임자한테 들은 얘긴데요. 작년 9월에 그 집에서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짐 옮기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그런 일 있었어요?”

“작년 9월….”
하나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기억난다. 그날 토요일 날이라 오전수업 마치고 오후 늦게 가게 보러 나가던 길이었는데, 그 집 앞에 이삿짐 트럭이 서 있었어. 이사 간다는 말은 못 들었거든. 그래서 좀 이상하다 싶었지. 그날 밤늦게 그 집 선생님 부부가 슈퍼에 물건 사러 왔길래, 내가 ‘아까 그 트럭 뭐냐’고 물었더니, 가까운 친척 짐이라고 했어. 사정이 있어서 잠깐 맡아주는 거라고.”

“그런 적이 있긴 있었군요.”
“근데 그건 왜 물어봐?”
“시기가 비슷해서요. 우리 집 재산이 팔린 게 그 무렵이거든요.”
“아…”
“그래서 어쩌면 그때 우리 집 짐이 그 집으로 옮겨졌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정말 너네 집 가구들이 맞다면, 그럴 수도... 참 시기가 좀 묘하긴 하네.”


나는 선배에게 그때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목사 얼굴,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이상하다니?”
“어설프게 예수 흉내라도 내는 것 같았어요. 머리도, 수염도 그렇고… 안경만 빼면요.”
“음…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얼굴을 일부러 가린 느낌이었어요. 내 보기엔 그랬어요.”

하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하나슈퍼 앞에 도착했다.
평상 위엔 아무도 없었다.
우린 평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나란히 앉았다.

건너편 슈퍼 안엔 아까 봤던 아주머니가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나는 가방을 열며 말했다.
“보여줄 게 있어요.”

그리고 신문 한 부를 꺼내 평상 위에 펼쳤다.
지난주 화요일자, 교회 관련 기사가 실린 신문이었다.
손가락으로 기사를 짚으며 말했다.
“여기, 한번 읽어보세요.”


하나가 기사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르포 연속기획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시한부 종말론”
곧 조용히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기사를 다 읽은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기사… 저기 빨간 대문집 얘기하는 거 같은데?”

“그렇죠? 저도 기사 읽으면서 그 생각했어요. 아까 진수가 말한 네 곳 중 한 곳인 거 같아요."

"기자가 신도인척 하고 그중 한 곳에 잠입 취재 중인 거겠지.”

"아마도요."

하나는 흥미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재미있네. 근데 누굴까? 그 기자가.”


나는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엔… 그 기자, 아까 거기 있는 것 같아요.”


하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네가 어떻게 알아? 그게 누군지.”

“쥐색 정장 입은 아저씨요.”

“아까 그 아저씨? 여자 전도사 방에 들어왔던?”

“네. 그 아저씨가 내가 말한 매주 화요일마다 슈퍼 앞에서 신문을 받아가는 사람이에요.”

하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럼 그때 신문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그 아저씨였구나. 근데 넌 왜 아까는 모르는 척했어?”


“지난번에 제가 그 아저씨가 그 집에 드나든다고 말했었죠? 그날, 진수도 그 집 안에서 봤다고 했잖아요.”

“응, 기억나.”

“사실… 그날 제가 그 아저씨를 몰래 뒤 따라갔었어요.”


나는 하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대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는데 그 아저씨가 안쪽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어요. 내가 따라온 걸 눈치챈 거죠.”

“어머… 놀랐겠다.”
“네. 그 아저씨가 바로 문을 열고 나오더니, 내 두 팔을 잡고 담벼락 쪽으로 밀었어요. 누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낮추고, 완전히 협박하듯 말했어요.”


하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라고?”
“왜 자길 따라왔냐고 묻더니, 앞으로 이 집 근처엔 오지도 말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도 말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오늘, 여기서 날 본 적 없는 거야.’라고요.”


나는 그때의 공기를 떠올리며 조용히 덧붙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때 느낌이 왔어요.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요. 어서 가라는 말에 등 떠밀리듯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그냥 돌아섰죠. 뭐.”


하나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
“그래서 아까도 처음 본 사람처럼 굴었던 거구나.”
“네. 그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시 그 아저씨도 날 처음 본 척하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자기 신분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아요.”


하나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네 예상이 맞다면... 진짜 점점 재밌어지는데.”


하나는 고개를 돌려 캠코더가 들어 있는 가방을 열었다.
“우선, 아까 찍은 비디오 잘 찍혔는지 확인해 보자.”

하나는 카메라 상단 플립을 열고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지잉—’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가 밤공기 속으로 퍼졌다.
‘턱.’
테이프가 다 돌아갔다.


하나는 뷰파인더를 들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작은 스피커에서 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하나는 눈을 뷰파인더에 댄 채 말했다.
“잘 찍혔어. 다행이다.”


그녀가 뷰파인더에서 얼굴을 떼고 말했다.
“너도 한번 볼래?”
“네.”


나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뷰파인더 흑백 화면 속엔 거실의 신도들과 TV 화면이 잡혀 있었다.

설교 소리도 멀리서 들리긴 했지만 또렷했다.
“이거 실제로는 컬러로 찍힌 거죠?”
“그럼. 뷰파인더가 흑백화면일 뿐이야.”


하나가 다시 뷰파인더에 눈을 가까이 댔다.
잠시 후, 영상을 넘겨보던 그녀가 말했다.
“오영아… 잠깐만. 여기 이 사람 봐봐.”
“왜요?”
“우리 카메라를 계속 보고 있어.”
“뭐라고요?”
“봐, 여기 이 장면.”


난 화면을 되감아 확인했다.
작은 뷰파인더 속에서, 분명 누군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쥐색 정장남이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평상 앞으로 다가왔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니?”
낯익은 목소리였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