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스페셜 미드나잇 4부
분말 수프를 풀어 넣자
내 책상 위에는 반찬 가방이 올려져 있었다.
잠시 후, 진수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내가 말했다.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꼭 전해 드려.
근데 어디 갔다 온 거야?”
“어. 희훈이한테.”
“걔한테 무슨 일로?”
“이따 방학식 끝나고 점심 같이 먹자고 했어. 너네 집에서.”
진수 어머니 반찬을 싸 온 날엔 늘 진수랑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별일은 아니었지만, 희훈이를 불렀다는 말은 뜻밖이었다.
내가 웃으며 물었다.
“그새 친해진 거야?
진수가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좋아. 뭐 그렇다면, 내가 끝내주게 맛있는 라면 끓여줄게.”
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바리. 끝나고 바로 너네 집으로 오라고 했어.”
4교시 담임선생님과 반 아이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교문을 나와 곧장 1층 미미분식집에 들러 떡볶이 한 접시를 포장주문했다.
희훈이도 온다기에 달랑 라면만 먹이긴 뭐해서였다.
사장님이 떡볶이와 함께 튀긴만두를 덤으로 싸주셨다.
따끈한 떡볶이를 싸들고 가게를 나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4층 복싱체육관 앞을 지나는데, 체육관 문을 열고 나오는 관장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어, 그래.”
관장이 손인사를 하며 말했다.
“좀 전에 누가 올라가길래, 넌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누가 올라갔나요?”
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수가 내게 말했다.
“희훈이가 벌써 왔나봐.”
관장은 진수를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 그때 그 덩치 컸던 애?”
“네, 맞아요. 오늘 점심 같이 먹기로 했거든요.”
"너희, 뭐 이젠 삼총사라도 된거야?"
그 말에 진수와 난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그때 위쪽에서 찬바람이 휑하니 불어왔다.
관장은 잠시 위를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관장은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왔다.
관장은 비닐봉지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귤 아닌데, 밥 먹고 후식으로 먹어.”
봉지 안에는 알이 작은 귤이 스무 알 남짓 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관장은 어서 가보라는 손짓을 하면서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는데 다시 한번 찬바람이 들어왔다.
옥상 출입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툭툭 치는 소리가 났다.
옥상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니, 희훈이가 구석에 매달린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어. 왔어?”
희훈이는 고개만 돌린 채 샌드백을 계속 두드렸다.
진수가 말했다.
“바람이 찬데 그만하고 들어가자.”
희훈이는 서너 번 더 주먹을 휘두르더니, 평상 위에 놓인 책가방을 집어 들고 우리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는 다행히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나는 주방으로 나와 싱크대 옆 연탄보일러 뚜껑을 꼬챙이로 열었다.
위 연탄은 아직 붉게 타고 있었고, 아래 연탄은 잿빛으로 다 타 있었다.
다 타버린 아래 연탄을 꺼내고 새 연탄을 갈아 넣었다.
희훈이는 방 안을 둘러보더니 책상 위에 있는 라디오 카세트를 켜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철컥'
노래가 흘러나왔다.
♪난 YO! 언제나 너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그대 눈빛이 마주칠 땐 고개 돌리며 다른 얘길 하네.
내 YO! 마음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나의 이 아픈 가슴을 너는 아는지,
나의 진실을 이해하는지 GUITAR!♪
희훈이와 진수가 랩을 따라 불렀다.
희훈이는 기타 소리에 맞춰 기타 치는 시늉을 했다.
♪소리 없이 울다 지친 슬픈 내 모습을 그저 바라보는 그대 앞에 나의 모습 보이리라.
애써 미소를 내게 보이는 슬픈 너의 눈빛을 이제는 다시 바라볼 순 없어.
내 모든 걸 당신께 말해주고 싶어.
작은 마음 드리리라.
나는 항상 그대의 마음 곁에 있어.
소중한 건 너 이기에.
내 모든 걸 당신께 말해주고 싶어.
작은 마음 드리리라.♪
<서태지와 아이들 1집(1992년) ‘내 모든 것’ 가사 중 일부.>
나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스불에 냄비물을 올렸다.
진수는 내가 라면을 끓이는 동안 익숙한 손놀림으로 상을 차렸다.
김치와 밑반찬, 수저와 그릇을 놓고 포장해 온 떡볶이와 튀김 만두를 비닐을 풀지 않은 채 그대로 올려놓았다.
잠시 후, 다 익은 라면을 냄비채 상 가운데에 내려놨다.
진수가 냄비 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방안에 퍼졌다.
우린 아무말 없이,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를 배경으로 라면에 밥, 떡볶이, 튀김 만두까지 푸짐한 밥상을 깔끔하게 해치웠다.
"아. 배부르게 잘 먹었다."
진수가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점심 진짜 잘 먹었어.”
희훈이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지난번도 정말 맛있지만, 오늘 김치라면이 더 맛있는 것 같다.”
“맛있다니 다행이야. 이게 다 자취생 짬밥아니겠냐.”
내가 웃으며 말했다.
희훈이는 물을 한 모금 들이킨 뒤 말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그냥 둬. 이따 내가 하면 돼.”
“아냐. 그래도 밥값은 해야지.”
희훈이는 밥상을 번쩍 들어 주방으로 나갔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서인지, 설거지는 손에 익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 사이 진수 어머니가 보내주신 반찬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희훈이가 말끔히 닦아 놓은 상을 방으로 다시 들여왔다.
그리고 아까 관장이 건네준 봉지에서 귤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희훈이는 가방에서 흰 봉지를 꺼내 상 위에 올렸다.
안에는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희훈이는 음료수를 꺼내 내게 건넸다.
“넌 여기서 언제부터 자취한 거야?”
“응, 작년 9월부터,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네.”
희훈이가 귤 하나를 까며 말했다.
“그전에는?”
“근처에서 하숙을 했어.”
“너네 집은 어딘데?”
“서안.”
“자식, 촌놈이었네.”
“그래, 나 촌놈이다. 어쩔래.”
희훈이가 피식 웃었다.
"뭘 그리 발끈하냐. 흐흣
근데 왜 하숙을 하다가 자취하게 된 거야?”
진수가 내 대신 말했다.
“얘네 아버지, 갑자기 사라지셨어. 그러는 바람에...”
희훈이가 놀라 나를 봤다.
“갑자기 아버지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소각장, 그날 기억나지?”
희훈의 얼굴이 찌푸리며 말했다.
“씨-이. 나 그날 숨 멎는 줄 알았다.”
“너, 그날 학교 방송이 살린 줄 알아.
내가 놀리듯 말했다.
“그날 학교 방송에서 날 찾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어.”
“아버지 실종?”
“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실종이 아닌 것 같았지만...”
“실종이 아니라니?”
“아버지가 스스로 모습을 감춘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아버지가 당시 휴거 종말론에 깊숙하게 빠져 계셨거든.”
진수가 놀란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굳어지더니 고개를 떨궜다.
희훈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아버지가 사라지기 전에 아무런 기미도 없었어?”
“어. 전혀.”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 학교에 입학하고서부터 쭈욱 아버지는 서안에서 혼자 지내셨으니까.
그래서 그 무렵 아버지가 어떤 상태였는지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었어.
마지막으로 서안집에서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말을 멈췄다.
“사실 아버지는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왜?”
희훈이 물었다.
“내가 휴거를 완강히 부정했거든.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고... ”
나는 숨을 골랐다.
“그래서 나역시 그땐... 아버지를 피하려고만 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희훈이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우리 엄마도 휴거를 믿고 계셨거든.”
“네 어머니도?”
나는 며칠 전 하나에게서 이미 들은 이야기였지만, 모른 척하며 물었다.
“말도 마라.”
희훈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놈의 휴거 때문에 집안이 완전히 풍비박산 났으니까.”
희훈이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랑 나는 믿는 종교가 없었어.
그래도 엄마가 교회 나가는 건 반대하지도 않았었고.
그 휴거라는 걸 믿기 전까지는 말야.
원래 엄마가 다니던 교회도 그런 데가 아니었거든.
그런데 한 3년 전쯤, 종말론이 퍼지면서 담임목사가 휴거에 빠졌어. 병신같이.
신도들도 그대로 따랐고.”
희훈이는 귤을 하나 집더니, 위로 던졌다가 다시 받아 쥐었다.
“그때부터였어.
교회에 나가면 집에 안 들어오고, 연락도 안 되는 날이 많아졌어.
나중에 알고 보니 교회에서 숙식까지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
그런 일이 잦아지면서 아버지랑 엄마는 매일같이 다퉜어.”
희훈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이어갔다.
“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 통장에서 돈이 몽땅 빠져나간 걸 알게 됐는데
엄마가 아버지 몰래 전부 교회에 갖다 바친 거였어.”
희훈이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난리도 아니었어.
화난 아버지를... 말릴 수가 없었어. 그땐”
희훈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이혼하겠다고 했고, 엄마는 끝까지 집으로 돌아오길 거부했어.
그래서 결국 아버지는 이혼을 결단할 수밖에 없었고.”
희훈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부모님을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내 편은 아무도 없더라.
둘 다 잃은 셈이 됐지.”
희훈이가 피식 웃었다.
“웃기지?”
나와 진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웃음이 웃음이 아니라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있다가 희훈이가 이어 말했다.
“그때부터였어. 화가 너무 났어. 풀 데가 없더라.
그래서 학교에서 애들한테 그 화풀이를 한 것 같아.”
희훈이가 진수를 보며 말했다.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했다. 진짜로.”
진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금도 어머니랑 연락 안 되는 거야?”
내가 물었다.
“응. 한 번도 찾아온 적 없어.”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희훈이 화제를 돌리려는 듯 내게 물었다.
“그런데 왜 진수 엄마가 반찬을 너한테 보내주신 거야?”
“얘 혼자거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수가 말했다.
“혼자라고?”
희훈이 물었다.
“우리 엄마 돌아가셨어.”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중3 때. 급성심정지로…”
“그랬구나.”
한동안 방 안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침묵을 깨고 희훈이가 물었다.
“그런데 너네 아버지는 어쩌다 휴거를 믿게 된 거야?”
“엄마 돌아가신 뒤에, 엄마랑 알고 지냈다는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어.”
그 사람들이랑 어울리더니 그렇게 됐어.”
“그러다가 작년 8월에 아버지가 갑자기 모습을 감췄고, 얼마 지나서 우리 집이랑 땅이 다 팔렸어.
아버지가 스스로 판 건지, 아니면 강요에 의한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희훈이가 말했다.
“스스로 팔게 만든 거야. 알량한 믿음을 빙자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의 휴거 때문에 망가진 집이 한두 집이 아니야.”
희훈이가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내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땐 아무에게도 말하기 싫었어.”
그때는 누구에게도, 아버지가 실종된 이유가 휴거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진수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난... 니들이 휴거 때문에 부모님을 잃게 될 건 줄 몰랐어.
그런 줄도 모르고, 휴거 될 거라며 떠들어서 미안해.”
“미안해할 건 네가 아니야.”
내가 말했다.
“믿음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속이고, 돈 뜯어낸 놈들이 사과할 문제지.
그나저나 넌 돈 뜯기거나 한건 없지?”
“난 헌금할 돈도 없었으니까.”
진수가 작게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말했다.
“하긴 애들한테까지 돈 뜯을 방법도 없었을 테니까.”
희훈이가 진수에게 말했다.
“야, 이제라도 알았으면 된 거야.
다시는 휴거 따위 믿거나 그런 교회엔 얼씬도 하지 마.”
진수가 대답을 하지 않자, 희훈이가 진수의 목을 팔로 휘감으며 말했다.
“어쭈? 대답 안 하냐?”
“야, 목 아파.”
진수가 희훈이 팔을 떼어내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안 나갈게. 그만해.”
나는 진수의 어깨를 툭 쳤다.
“넌 정말 운이 좋은 거야.”
희훈이가 웃으며 말했다.
“진수야, 우리가 너 구원해 준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구원은 신이 해주는 게 아니야.
누가 대신 해주는 것도 아니고, 결국 구원은 스스로 하는 거지.”
나는 잠시 말을 고르고 덧붙였다.
“그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은...
나약한 사람의 마음을 그 자리에 붙잡아 매두기 위한 말 같아.”
말이 끝나자 방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 침묵은 무겁기보다는, 세 사람이 같은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시간에 가까웠다.
잠시 뒤, 희훈이가 내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인마, 넌 왜 이렇게 진지하냐. 무슨 세상 다 아는 놈처럼.”
그리고 희훈이가 피식 웃었더니 귤 한개를 꺼내 나한테 높이 던졌다.
난 천장 근처에서부터 떨어지는 귤을 받아 쥐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