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화가와의 추억

검은 도화지 위의 바다

by 빛나다온

3년 전,

지금쯤 5학년이 되었을 2학년 하영이(가명)는 6월의 햇살처럼 우리 돌봄 교실에 새로왔다.

수줍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던 하영이(가명)는 말수는 적었지만 당차고 웃음이 많은 아이였다.

어른들 표현대로 하자면 참한 아이.


나와의 활동도 성실하게 참여했고, 프로그램도 마치 우등생처럼 척척 잘 따라왔다. 어느 날 아이들과 그림 그리기 시간을 가졌다. 도화지와 크림파스를 나눠주며 그리고 싶은 걸 그려보라 했다. 그때, 전학 온 하영이가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검은색 도화지도 있어요?"

흔치 않은 요청이었지만 나는 검은 도화지를 찾아 주었다.


검은 배경 위에 펼쳐지는 선과 색, 절제된 색감과 형태는 분명 어린이의 그림이지만, 내 눈을 사로잡는 작품이었다. (내 눈에는...)


"우와, 하영이 예쁘게 정말 잘 그리는구나! 미술 학원 다녔어?"

"아니요. 그냥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요."
"밤 풍경이야? 거의 예술 작품인데?"
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의 손끝에서 피어난 여름풍경과 바다 그림은 마치 이야기 하나를 품은 듯 말없이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다. 아이만의 눈으로 본 세상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내 칭찬에 하영이의 눈빛은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뿌듯함으로 반짝인 듯했다.

다른 친구들에게 하영이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다른 친구들도 그림 너무 잘 그렸어요. 그런데 하영이는 검은 도화지를 활용해 밤 풍경을 잘 표현했죠?"

"우와, 진짜 예쁘다!"
"진짜 잘 그린다."


아이들의 탄성이 교실을 채웠고, 그날부터 하영이는 우리 반의 '작은 화가'가 되었다.

하영이는 틈만 나면 종이를 달라했다. 나는 종이뿐만 아니라, 필요한 게 있으면 최대한 챙겨주었고, 아이들과 만들기도 하며 놀아주었다.
그림 실력만큼이나 표현력도 풍부했던 하영이는 동물도 그리고 풍경도, 친구들 얼굴까지 정성껏 그려주었다.

"하영이는 못하는 게 뭐야? 선생님이 보니까 피구도 잘하고 줄넘기도 잘하고 다 잘하는 것 같아~"

그때 아이가 해맑게 말했다.
"춤은 못 춰요. 방송댄스부 공개수업 때 아빠가 저보고 못 춘다고 했어요, 히히."

으쓱할 법도 한데 솔직한 면도 있었다. 그림에 집중하던 하영이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이들의 손끝에서 일어나는 작은 기적과 소중한 순간들을 간직하고 싶어 밴드를 개설했다.

내가 리더이자 회원이 나 하나뿐인 비공개 밴드를 개설하여 2017년부터 아이들과의 소중한 순간들을 저장해오고 있다.

휴대폰이 바뀌어도, 번호가 바뀌어도 그곳은 언제든 추억을 꺼내볼 수 있는 나만의 보물상자다.


그날 찍은 아이의 그림도 카메라로 담아 '돌봄 교실 추억 앨범'에 저장해 두었다. 지금처럼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더 많은 사진을 찍어두었을 텐데... 그게 아쉬울 뿐이다.


가끔 내 밴드에서 사진첩을 들여다본다. 돌봄 교실을 거쳐간 학생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보고 싶기도 하고, 야단을 쳤던 아이들은 '내가 왜 그랬을까?' 라며 후회도 하며 추억에 잠기곤 한다.


나 역시 어릴 적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듣곤 했지만, 그 시절을 증명할 만한 무언가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아이들의 추억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그리고 내 밴드 앨범 속에 존재한다.

하영이도 내게 물었다.
"선생님도 그림 잘 그려요?"
"그림 좋아해요?"

"응, 선생님도 어릴 때 그림 좋아했어. 하영이처럼."


서로의 감성이 연결되는 기분이었을까? 그 한마디에 하영이는 좋아했다. 하영이의 손끝에서 태어난 세상은 교실 환경판을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2학기가 되면서 하영이는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들 속으로 떠났다. 마지막날, 하영이는 나에게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2022년 여름 하영이(가명)가 주고 간 편지


돌봄 선생님, 저 하영이에요. 제가 심심해하면 재밌는 것도 주시고, 재밌는 놀이도 많이 가르쳐주셔서 감사하고 절 아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하트
- ㅇㅇㅇ 올림 -



나는 편지(종이)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아이의 그림도 아이의 말도 내 마음에 오래 남아 있으며 오늘도 추억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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