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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ara Feb 28. 2020

집 옆 산책로

슴슴한 켄터키 일상 한 스푼-1

켄터키 집에 들어온 지 2주 정도 지났다. 짐 정리와 각종 서비스 신청의 어수선함이 지나고 엉덩이가 배겨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던 골칫덩이 소파까지 내다 버린 후 크레이그리스트에서 발견한 베이지색 패브릭 소파를 들여놓고 나니 제법 집다워진 모습이다. 소파에 깊숙이 배긴 전 주인의 향기를 지우기 위해 페브리즈 한통을 거의 다 썼지만 아늑하고 푹신한 것이 드디어 엉덩이도 제집을 찾은 기분이다. 미국에 온 첫 달은 집에 큰 여행가방만 남겨두고 멕시코 칸쿤과 미국 남부 올랜도로 여행을 다니면서 보냈기 때문에 그저 휴가를 떠난 기분이었다면 실질적인 생활은 이제 막 시작된 셈이다. 아이도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남편도 1년간 켄터키 대학교에서 학생으로 지내게 될 예정이었다. 허공에 붕붕 떠있던 마음도 생활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땅에 무사히 착륙했다.

오늘 아침에는 며칠 만에 산책을 나갔다. 단지 내에 공원과 이어지는 산책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3분만 걸어 나가면 드높은 나무를 마음껏 만날 수 있다. 역세권보다는 숲세권을 차보다는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집 옆 산책로야말로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이다. 잎을 떨구고 가지만 남아있는데도 이곳 나무들은 덩치가 커서 그런지 쓸쓸함보다는 듬직한 느낌을 준다. 초록잎 가득 위용을 자랑할 나무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켄터키의 봄이 기다려진다. 날이 추워 그런지 산책로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신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며 모양도 제각각인 솔방울, 촐랑촐랑 뛰어다니는 다람쥐들이 길을 복작 이게 만들고 있다. 몇 번의 산책을 통해 느낀 것은 이 길에는 사람보다 다람쥐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처음 몇 번은 신기하고 귀여워서 핸드폰을 갖다 댔는데 이제는 많이 봐서 그런지 비둘기 보듯 별 감흥이 없다. 이곳 사람들과 나무들처럼 다람쥐들도 어찌나 덩치가 큰지 나뭇가지에 오를 때면 가지가 활시위처럼 휘청댄다. 바닥에는 도토리가 천지인데 도토리도 밤송이 못지않게 굵고 실하다. 나무가 크니 열매도 크고 그 열매를 먹고사는 다람쥐도 큰 것이 당연한 이치일 테다. 친정엄마가 있었다면 쫀득쫀득 맛있는 묵을 쑤기 위해 다람쥐들과 선의의 경쟁을 펼쳐가며 도토리를 모았을 것이다. 다행히 엄마 같은 무시무시한 경쟁자가 없는 다람쥐들은 오늘도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산책로 양쪽으로는 주택과 공원만 있고 도로와도 떨어져 있어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청량한 새소리와 사각사각 다람쥐가 열매를 갉아먹는 소리뿐이다.

다람쥐의 영역은 비단 산책로뿐만은 아니다. 집 앞에 있는 나무 둥지를 보고 새집이려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람쥐의 집이었다. 토요일 아침 창밖을 내다보니 마침 나무 위 집 밖으로 느긋하게 마실을 나가는 다람쥐와 눈이 마주쳤다. 봄기운이 찾아오는 어느 날 창문이라도 열어놓으면 우리 집마저 접수해 버릴 당당한 기세다.

산책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단연 호랑가시나무이다.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많이 본 나무인데 윤이 자르르한 초록 잎사귀에 루비 귀걸이처럼 빨갛게 빛나는 작은 열매를 가득 달고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호랑가시나무를 지나서 조금 더 걸으면 산책로의 끝에 다다른다. 펜스가 세워져 있고 그 너머로는 드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켄터키의 자랑인 말을 키우는 농장인 듯하다.

켄터키에서 1년간 살게 됐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가장 먼저 꺼냈던 말이 있다.

"아~ KFC!"

간혹 켄터키와 캔자스를 혼동해서 오즈의 마법사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예외지만 말이다. 켄터키 하면 우리는 KFC의 본고장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이곳을 대표하는 동물은 닭이 아니라 바로 말이다. 세계적인 말 산업의 중심지로서 미국에서 말을 가장 많이 기르는 곳이자 가장 우수한 말을 배출해 내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사는 지역 렉싱턴을 포함한 켄터키 몇몇 지역을 블루그래스라고 부르는데 이곳 말들이 먹는 잔디 품종이 바로 블루그래스이다. 매년 5월이 되면 이곳에서는 켄터키 더비라는 경마 레이스가 열린다. 경주가 있는 5월 첫째 주 토요일이 오기 훨씬 전부터 작은 도시는 이미 축제 분위기로 들썩인다. 1875년에 시작된 켄터키 더비는 아직도 그 전통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데 관중들도 드레스코드가 있어서 남자는 신사복을 차려입고 여자는 커다란 모자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다. 생전 모자라고는 해변에서 볕을 가리거나 머리 안 감은 날 쓰는 정도가 전부인 나는 영국 귀족들이나 쓸법한 화려한 모자를 쓴 내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경험의 빈약함은 상상력의 빈약함을 낳는다.

집에서 출발해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시간은 50분 정도 걸음은 6 천보 정도가 나온다. 걷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체활동이자 정신활동이다. 답답한 헬스장에서 하는 걷기는 지루해서 30분을 넘기기 쉽지 않은데 야외 걷기는 언제나 환영이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쏙 집어넣은 채 걸으면 따로 복근 운동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운동효과도 뛰어나고 정신적으로는 마치 걸으면서 일기를 쓰는 것처럼 하루를 정리할 수도 있고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다짐이나 반성도 하게 되므로 정신건강에도 매우 좋다. 올해는 정말 원 없이 걸을 작정이다. 계획대로 산다면 올해 말경에는 200만 보 정도의 걸음을 쌓을 수 있을 듯하다.

올 한 해 열일 할 나의 발!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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