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세에 중고 신입사원이 되다
'오늘부터 ERP팀에서 근무합니다. 정리해서 15층으로 올라가세요.'
바라던 일이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던 그날.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다닌 지 8년. 내 나이 33살에 경력 없는 신입으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에 내 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내가 다니던 작은 회사는 망해가고 있었다. 잘 나갈 때는 업계에서 2~3위 할 정도로 매출 규모도 있었고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알짜라고 소문나서 은행들이 서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직원복지도 자녀대학등록금까지 전액보장해 줄 만큼 괜찮았으며 성과급도 매년 두둑이 챙겨줬다고 한다. 서울에 본사건물도 있고 공장도 아산에 크게 있는 나름 튼튼한 회사였는데 거기에는 볼펜 한 자루도 다 쓴 걸 확인받아야 다시 사주는 창업주 할아버지의 단단한 경영이 밑받침이 되었다고 한다. 창업주 할아버지는 공장이든 서울사무실이든 본인이 직접 가서 챙겨야 성이 풀리는 분이었어서 어디 하나 물 샐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은 그렇게 배우질 못했는지 하나뿐인 아들이 세상없는 망나니라 일찌감치 창업주 할아버지가 회사에 발도 못 들이게 했었다고 하는데 창업주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누구 하나 손쓸 틈 없이 망나니 아들이 회사로 밀고 들어옴에 따라 방만한 경영이 시작되었다. 회사 회장이라는 사람이 점심때쯤 느지막이 회사에 나와서 몇 시간 버티다 퇴근하고 자기 회사에서 무슨 제품을 파는지도 몰랐다고 하니 그런 회장이 경영하는 회사가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마 중간에서 빼먹고 뒤에서 해 먹는 인간들이 많았을 거라고 다들 수군대며 짐작만 할 뿐 30년 넘게 탄탄했던 회사가 무너지는 건 불과 몇 년이면 충분했다.
이런 회사 사정을 알 리 없는 내가 입사한때는 회사가 무너지기 시작하기 직전 정도쯤이었고 몇 년 후 그 망나니 회장은 달랑 30억에 회사를 사기꾼에게 팔아치웠다. 자기 아버지가 피땀으로 일군 회사를 공장땅값도 안 되는 가격에 턱 하고 팔아치우고 본인 일신만 챙기는 걸 보니 참 기가 막혔지만 일개직원인 우리가 뭐 어쩌겠는가.
그 지독한 사기꾼들은 어음을 남발하고 주가 조작을 하며 크게 한탕을 해 먹었고 또 다른 사기꾼들에게 회사를 넘겼다. 그렇게 껍데기만 남은 회사는 1차 부도가 두 번 정도 났고 경리부 전원이 3개월을 주 7일 근무하며 밤낮없이 애쓴 덕에 회사가 회생절차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전산팀 모든 팀원은 회사를 떠났고 나는 사직서를 N번 썼지만 너까지 그만두면 시스템은 어쩌냐고 N번 반려당하면서 결국 마지막까지 전산시스템을 돌리고 있던 최후의 1인이 되었다.
그렇게 곧 망할 것 같던 회사는 어찌어찌하더니 같은업을 갖고 있는 대기업 계열사에 인수합병이 되었다. 사실 공장부지만 해도 인수하는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라고 하긴 했다.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각 팀 팀장님은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되었고 업무를 직접 하는 담당자들만 서울 양재동 한복판의 사옥 5층 구석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나도 나 혼자 근근이 돌려오던 전산시스템을 싸들고 이사 오게 되었다.
처음 이사 와서는 어색하긴 해도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은 다 아는 사이니 그럭저럭 지낼만했지만 계열사별 전산시스템 관리자는 모두 IT본부 소속으로 근무하게 된다는 원칙에 따라 나만 다른 계열사의 IT본부로 발령이 나게 된 것이다.
내가 근무하게 될 부서는 ERP팀. 전 계열사가 쓰는 ERP는 그 유명한 SAP이다. 회사의 가장 근간이 되는 기간시스템으로 현업 사용자에게 불친절하고 딱딱하며, 운영자도 많은 공부가 필요해서 운영하기가 쉽지 않은 시스템이지만 정확성과 신뢰도만큼은 여타 다른 ERP시스템이 따라오기 힘들 만큼 훌륭한 시스템이기도 하다.
그만큼 신뢰도는 높지만 접근성은 떨어지는 시스템인데 나는 망해가는 우리 회사가 인수합병 되면서 모든 회사는 SAP를 쓴다는 원칙에 따라 급하게 3개월 만에 인수합병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참여해서 현업처럼 사용법을 익힌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국내산 ERP이기는 하지만 ERP를 고생고생하며 구축해 본 적도 있고 제조업의 업무만큼은 생산이든 구매든 영업이든 잘 아는 편이었으므로 SAP 구축프로젝트를 할 때 도움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업느낌이지 운영자 느낌은 아니었고 거기다 이미 33살 중고신입으로 리얼 신입처럼 일할수는 없을터. 이래저래 부담스러운 발령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 그만둘게 아니라면 가야겠지. 망해가던 회사에서 서로 위로하며 견디던 회사동료들을 뒤로하고 짐을 싸서 15층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