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무등산
오랜만에 산을 오른다.
둘이서 함께 산을 갈 수 없던 몇 달이 흘렀고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여유가 생겼다.
그나마도 일로 내려가는 그의 일정에 무리를 해서 묻어가는 길이다.
올 겨울 태백산을 마지막으로 멈췄던 한국의 100대 명산을 어렵게 이어가려고 동행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대충 산행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모든 여행의 시작은 '망설임'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언제나 이 순간이 오기까지가 가장 고비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귀찮은데 집에나 있을까 하는 마음을 누르고 배낭을 둘러매고 현관문을 잡기까지 얼마나 여러 번 갈등을 하는지... 생각보다 집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이렇게 새벽같이 서둘러 길을 나서는 건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현관문이 닫히고 땅을 몇 걸음 디디고 나면 이런 생각은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걸 느낀다.
'역시 떠나기를 잘했구나.'
누군가 집 떠나는 즐거움을 '이가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집 떠나는 즐거움은 이제부터 시작인 거지.
그렇게 마음을 잡고 길을 나선다.
2013년 봄 무등산 정상 부근에서 봤던 상고대의 기억을 떠올리며 들머리에 섰다.
3월에 따뜻하리라 생각했던 곳에서 뜻밖에 상고대를 만나니 어찌나 설레던지...
알싸한 추위보다 아직 남아있는 겨울을 만나서 싱그러웠던 날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은 입석대, 서석대, 상고대 이렇게 3대만 남아있고 10여 년 만에 무등산에 다시 들려고 하니 그때는 대체 어디를 들머리를 삼았는지 아예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다.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게 얼마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건지 새삼스럽다.
중심사-중머리재-장불재-입석대-서석대-중봉-중머리재-중심사로 다시 돌아오는 길.
산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걷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순간이 오는데 그럴 때는 오로지 나만이 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착각이 들 때가 있다.
분명 둘이서 걷고 있었는데 나 혼자인듯한 세상이 펼쳐질 때...
가파른 오르막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오름길에 문득 넓은 평전을 만나게 되는 숨통이 탁 트이는 시선.
이건 그 길을 오르는 자만이 느껴볼 수 있는 고요함 이리라.
무등산 또한 예외는 아니다.
막연히 고도만 높겠지 싶지만 지리산 세석평전 못지않게 높은 곳에 넓게 펼쳐져 있는 장불재.
산에 오르다 이런 곳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앞만 보고 걷던 길을 멈춰 서게 된다.
그 재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
앞으로 올라가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아 있음에도 한참을 그곳에서 멈춰서 사방을 살핀다.
내가 이곳에 없었다면 아마도 이 넓은 들판을 산들 짐승들이 뛰어놀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이 넓은 재에서도 마스크를 쓰며 사람들과 떨어져 쉬고 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사라진 산짐승들은 지금 어디에 숨어있을까?
그들의 자리를 내가 올라섰기에 이렇게 마스크를 쓰고 있는 현실에 갇혀 있는 게 아닐는지...
입석대-서석대를 가야 한다며 스스로 목적지를 정해놓고 걷는 내 행위가 나에게는 쉼과 휴식이지만...
갈까 말까 게으름에 망설이다 출발하며 오길 잘했다고 토닥이는 즐거움이지만...
나는 과연 자연에게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걸까?
비할 데 없어 높은 이곳 무등산에 올라 이런 풍경을 즐기는 건 분명 내게 큰 즐거움이지만
부디 나의 이 걸음이 자연에게 조금이나마 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걸어본다.
나의 떠나는 즐거움이 산, 들, 날 짐승에게도 자연에게도 이로울 수 있는 걸음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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