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는 자녀를 존중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의 자녀들은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찾기도 힘들고 갖기도 힘들며 알기도 힘들다. 한마디로 말해 정체성 혼란을 흔히 겪는 것 같다. 그것은 나르시시스트가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스트의 자녀들은 어떻게 자라게 될까?
내가 가끔 보는 '홍안녕'님의 블로그에는 아주 기가 막힌 비유가 나와있다. 나르시시스트의 자녀를 아쿠아리움의 '벨루가 고래'에 비유한 글이 있는데 아주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됐다. 벨루가 고래는 원래 넓은 바다에서 사는 것이 정상인데 수족관에 갇혀서 살면 좁은 수조 안에서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빙글빙글 돌게 된다. 그것은 벨루가 고래의 본모습이 아닐 것이다.
내가 중학생 때 중고등부 담임목사님이셨던 분은 블로그 글에 나르시시스트의 자녀를 '분재'로 비유해 놓으셨다. 그것도 아주 적절한 비유이다. 나르시시스트도 자녀에게 공을 들인다. 마치 분재를 키우는 것처럼 공을 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분재로 자란 식물이 자기 본모습대로 자랐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그리고 분재는 스스로 생존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손을 탄다. (출처를 밝히기 위해 이 목사님의 성함을 밝히는 것이 맞지만 우리 엄마가 이 목사님을 너무 이상화하시고 최근에 상담도 받으신지라 차마 성함을 밝히지 못하겠다. 내 생각에도 이 목사님이 훌륭하신 분은 맞다.)
나는 나르시시스트의 자녀를 부모의 '아바타'로 비유하고 싶다. 위에서 말했듯이 나르시시스트는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외모도 자신의 스타일대로 하길 바라고 직업도, 결혼도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길 바란다. 자녀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녀에게 인격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녀를 자신의 연장으로 보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려고 한다. 물론 자녀에게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가수 김완선 씨가 매니저인 이모와 있었던 일들을 말하는 것을 유튜브로 들었는데 그것을 보니 이모가 나르시시스트였고 김완선은 그 사람의 아바타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라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면 저렇게 하고 자기 의견은 말해봤자 무시당하고... 그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교사가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나중에 이것도 차차 글로 써보겠다.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다. 특히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 자기가 조종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