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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 Nov 01. 2021

27.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

  가끔 꿈이었는지 상상이었는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엄마가 온 것 같을 때가 있다. 엄마가 꼭 있었으면 했던 그런 순간이랄까. 그런 장면을 너무나 많이 세밀화 그리듯 상상해서 였을까. 화면은 세밀하지만 늘 침묵하는 엄마가 아주 가끔 말도 하고 나를 쓰다듬을 때가 있다.



  며칠 전 애들 재우며 함께 누웠는데 갑자기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를 낳은 직후 병실에서 커튼 뒤에 혼자 누워있었다. 엄마가 소리도 없이 나타나 고생했다며 눈물을 글썽이며 내 얼굴을 매매 쓰다듬고 있었다. 엄마가 늘 입던 보풀 난 니트 티에 정리 안 된 곱슬머리, 딸 걱정에 잠시도 쉬지 못한 듯 푸석한 얼굴이었지만 손길은 늘 그랬듯이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엄마 왜 이제 왔냐며 원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눈을 떴는데 잠든 것도 아니면서 꿈인 듯 생시인 듯 그랬다.



  엄마가 보고 싶다 말하기도 참 새삼스럽다. 어쩌다 한 번이라야 말이지 매일같이 드는 생각에 매일같이 그런 마음인데 보고 싶다는 말을 따로 하기가 뭔가 새로운 말을 시작하는 듯이 어색하다. 십 년이 가까워 오지만 엄마가 없는 느낌은 눈에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 마냥 익숙해지지 않고 불편하고 어색하다. 머릿속으로는 ‘엄마 없음’이 디폴트지만 마음속으로는 일일이 체크해야 하는 선택사항같이 그렇다. 역시 머리와 마음의 거리가 세상 어디보다 멀다.




  잠들 기 전, 자기 말이 순도가 더 높은 말이라고 경쟁이라도 하듯 두 아이가 번갈아가며 “나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라고 말한다. 나도 그랬다. 죽고 못 사는 연애를 할 때에도 엄마에 대한 사랑은 늘 다른 방에 한가득 차있었다. 지금이야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한때 우리 식구들을 푸대접하기 일등이었던 우리 아빠 덕에 집이 늘 포근하고 그러지는 못했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라도 따뜻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리 엄마 덕이다. 항상 오빠와 나를 다독이고 따뜻하게 품어준 건 엄마였다. 마지막까지 내게 가장 편한 쇼핑, 목욕, 수다 메이트는 엄마였다. 엄마가 없고는 쇼핑도 목욕도 혼자다.



  나는 다 커서까지도 모든 엄마가 다 우리 엄마 같은 줄 알았고, 엄마랑 딸은 다 우리 같은 줄 알았다. 엄마한테 혼이 났으면 났지 엄마랑 싸웠다는 말이 이상했고, 엄마가 불편하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다. 엄마는 있으면 다 좋은 거 아닌가 했다. 엄마는 내가 서른셋이던 해 어버이날을 막 지나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의 엄마와 나는 그랬다. 만약 지금 엄마가 있었다면 계속 엄마와 세상 둘도 없는 모녀로 지냈을까, 아니면 우리도 다퉜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어느 분의 말씀처럼 자식 노릇이 점점 버거워져가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보기도 한다.



  십 년이란 세월이 부족한지 나는 아직도 엄마와 헤어지지 못했다. 안 헤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전한 마지막 말도 “그동안 사느라 고생했어, 사랑해.” 그다음은 “다시 만나자.”였다.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하는 순간 엄마의 부재로 인한 슬픔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말한다. 다시 꼭 만나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아주 멀리 가려다 뒤돌아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다 가끔 정말로 나를 찾아오기도 하나보다. 엄마도 나를 무척 사랑했으니까. 다 큰 딸내미 얼굴을 닳을까 아까워서 만지지도 못하겠다 말하며 매매 쓰다듬던 엄마였으니까. 엄마가 내 얼굴을 매매 만지던 그 마음으로 곤히 잠든 아이들 얼굴을 나도 매매 쓰다듬는다. 곱다. 내 손이 엄마 손이 되고, 아이들 얼굴이 내 얼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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