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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남 Nov 29. 2020

원데이 클래스

창작소설 #03


“자, 중앙에서부터 물을 붓기 시작합니다. 물줄기는 최대한 가늘게, 천천히 나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거예요. 커피 가루 하나하나를 적신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세요.” 경환의 팔이 조금 떨린다. 왼손으로 테이블을 받쳐 균형을 잡는다. 오른손에 들린 주전자 물줄기 끝이 천천히 원을 그린다. 그리고 그 원은 점점 커지면서 나선을 만든다. 나선은 드리퍼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중앙으로 회귀할 것이다. 경환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나선을 보고 있다. 중심으로 끝없이 빨려들 것 같은 나선을.


월 50만 원이요? 경환은 놀랐다. 수중에 딱 100만 원이 있었다. ‘라면이랑 밥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하니 취업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야.’ 바로 전에 방문했던 곳은 20만 원이나 더 저렴했지만, 벽지에 곰팡이가 슬고 나무 방문이 부서질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근에 지어서 깔끔하고 지내기 편할 거예요.” 그는 서울 말씨의 주인아줌마를 믿기로 했다. 그는 전 재산이 들어 있는 기내용 캐리어를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 방문 오른쪽에 조그만 책상이 있었고, 왼쪽에는 유리 칸막이로 된 화장실, 그리고 딱 한걸음 반 앞에 침대가 가로로 놓여있었다. 공간의 모든 요소는 젠가의 블록처럼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책상에서 의자를 빼면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공간조차도 사라져 버려서 침대 위로 올라가야 했다. 침대에 누워 발을 뻗어보니 머리와 발이 벽에 닿았다. ‘키 큰 사람은 여기 못 살겠네' 경환은 생각했다.


그는 여행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대학교 졸업작품전 준비로 밤을 새우며 사용했던 노트북은 모니터 연결 부위가 분리될 것처럼 덜컹거렸다. 잡코리아, 디자이너스잡, 디자인정글, 디자인커리어스닷컴… 경환은 회사 리스트 필터에서 강남권, 신입, 그래픽을 선택했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파일을 첨부해서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회사, 다음 회사, 다음 회사… 남은 50만 원이 소진되기 전에 취업에 성공해야 할 것이었다. ‘취업은 금방 될 거야. 문제는 어떤 회사를 가느냐지.’ 그는 재능이 있었으므로 사회생활의 진입에 자신이 있었고 펼쳐질 미래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당장 잠자리부터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경환은 가장 가까운 이마트로 갔다. 제일 보잘것없어 보이는 베개가 3만 원, 특가할인 1인용 이불 5만 9천 원. 생각해보니 이불은 두 개가 필요했다. 침대 위에 그냥 누울 수는 없었다. 패드용 이불 2만 5천 원. 합해서 11만 4천 원. 경환은 이제 38만 6천 원을 소진하기 전에 취업에 성공해야 했다.



*

“물이 다 내려가기 전에 두 번째 추출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 추출보다 물줄기를 더 굵게 해주세요. 속도도 이전보다 조금 더 빨라집니다.” 경환과 사람들은 각자 주전자를 들고 2차 추출을 시도한다. 약간의 물이 찰랑거리는 드리퍼 위로 물줄기는 다시 나선을 그린다. 이전보다는 약간 빠르게. 경환은 물줄기의 낙하지점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본다. 그것은 그를 약간 어지럽게 만든다.


“야 최경환!” “네 실장님.” 실장의 갑작스러운 호명에 경환은 놀라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네가 하는 작업 말이야. 각 요소가 대비가 있어야지 그게 뭐냐.” 전국 전자마트에 보내질 시즌 포스터였는데 중앙에 연예인이 활짝 웃고 있고 사방으로 전자 제품 일러스트가 튀어나오는 디자인이었다. “가만히 보면 경환이 네 디자인, 그 뭐냐… 고등학교 입시생! 그 수준보다 못한 것 같아!” 사무실에 조용한 침묵이 흐른다. “아. 네… 다시 고쳐보겠습니다.” 경환은 무안한 듯 입꼬리를 올려보았지만, 마음은 일그러졌다. 자기 일에 자부심과 열정이 컸던 만큼 그는 심하게 낙담했다. 그는 모니터를 보고 구부정하게 앉아 종일 디자인 작업에 매달렸고 아이디어 회의가 끝나면 퇴근 시간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새벽 3시, 너덜너덜해진 영혼으로 정대리와 함께 늘 24시 탐앤탐스에서 30분 정도 회사 욕을 하고 헤어지는 것이 퇴근 후의 세레모니였다. 왠지 모르게 둘은 항상 카페라테를 마셨는데 우유 거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무언가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밤이 끝나서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카페인을 들이킨 후 하루를 마감하고 나면 똑같은 하루는 어김없이 시작됐다. 좁은 사무실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이 고된 노동으로 경환은 지쳐갔다. 그는 자신의 삶이 쳇바퀴 돌 듯 계속 반복되며 나선을 그리다가 쪼그라들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쳇바퀴   계속 반복되며 

나선을 그리다가 

쪼그라들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

“마지막 추출은 물줄기를 가장 굵고 빠르게 부어줍니다.” 경환은 이전보다 주전자를 더 기울여 나선을 그린다. 드리퍼 밑으로 물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주전자에서 나오는 물의 양이 더 많았으므로 물은 금방 불어났다. “에스프레소 추출은 기계의 압력을 이용하지만 드립 커피는 자연스러운 중력을 이용합니다. 드리퍼 안에 물이 많아지면 무게도 높아져서 물이 빠르게 내려가는 거예요.” 경환은 역삼각형 드리퍼의 끝으로 쪼르르 내려오는 커피를 본다. 보이지 않는 중력은 물을 드리퍼의 제일 좁은 부분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대부분 승객을 6층에 토해냈다. 경환도 인파에 쓸리듯 6층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정면으로 15개의 창구가 있었고 각 창구에 할당된 LED 숫자판은 정신없이 다음 순서를 알리고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격자 모양의 공공 의자는 빈자리 없이 모두 채워져 있었다. 경환은 번호표를 뽑고 벽에 기대어 섰다. 대기자는 34명이었다. ‘딩동’하는 소리가 들리면 창구를 향해 앉아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서류를 챙겨서 일어났고 대기자들을 곧장 가로질러 오른쪽 끝에 있는 좁은 통로를 향해 들어갔다. 빈자리는 그 즉시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고 창구의 담당자들은 로봇처럼 신속하게 응대했다. 대기자는 차근차근 줄어들고 있었다. 시간은 대기자들을 좁은 통로로 천천히 밀어내고 있었다.


상담사는 경환에게 몇 가지 서류와 카드, 홍보물, 책자를 내밀었다. “이 카드에 실업자님의 구직활동을 적는 거예요. 그리고 2주마다 한 번씩 여기에 와서 확인 도장을 받으시면 돼요.” 경환은 상담사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럼 저쪽 통로로 들어가셔서 ‘재취업교육’ 들으시면 됩니다.”


마을버스에서 내린 경환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장을 가로질러 터덜터덜 걸었다. 자신만 빼고 모두 바빠 보였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시장 끝에 있는 그의 단골 카페였다. 카페 앞에 세워져 있는 입간판에 분필로 쓰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드립 커피 원데이 클래스 수강 신청받습니다.”



*

물이 드리퍼의 좁은 끝부분을 통과하고 있다. “드리퍼의 마지막 물은 커피의 쓴맛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이 다 내려가기 전에 서버 위에서 빼주셔야 해요.” 강사는 물이 다 빠져나가지 않은 드리퍼를 옆으로 옮기며 말한다. “쓴맛도 커피의 일부분이긴 합니다. 근데 쓴맛은 에스프레소 커피의 특징이니까, 드립 커피는 아무래도 깔끔한 맛이 좋거든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얼른 드리퍼를 서버에서 들어 여분의 컵 위로 옮겨 놓는다. 경환은 자신의 드리퍼 위에서 빠져나가는 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지켜본다. 그는 마지막까지 드리퍼를 옮겨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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