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엄마가 될 거야
세상의 모든 아기오리들에게,
우리 엄마의 결혼생활은 대체적으로 고단했다. 맏며느리도 아니었는데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근방에 살던 시누 세 명이 매주 번갈아 시조카들을 데리고 놀러 왔다. '밤나무 등걸에 난 회초리와 같이 무서운 시아버님, 볕을 쬔 쇠똥같이 말라빠진 시어머님, 삼 년이나 걸려서 엮은 망태기에 새 송곳부리같이 뾰족하신 시누이님'이었다.(*작자미상 사설시조 일부 인용)
해마다 시댁 조상이 돌아간 날들을 기억해 뒀다가 상다리 부러질듯한 제사상을 차리는 일이며 명절 차례상을 차리는 일 등을 해내야 했다.
고단했다.
시집올 때 가져온 금붙이는 자식들 급식비를 내기 위해 팔았다. 일 년에 겨우 두 번 정도 만날 수 있었던 친정 언니들은 동생에게 아끼는 장신구를 주는 대신 차라리 생활비를 보태주었다. 동생이 그걸 끼고 다니는 게 아니라 팔아서 살림에 보탠다는 걸 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난이 물밀듯이 들어와 빠져나갈 틈이 없는 삶이었다. 분명 그 어딘가에 사랑도 있었을 테지만 늘 비좁아 몸을 부대끼면서도 추웠다.
내가 봤을 때 엄마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도 나는 결혼을 했다. 한번 행복한 엄마가 되어보고 싶었다. 나에겐 그 사람이 있었으므로 어쩐지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의 불행은 그런 오만함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걸까.
불현듯 몰아친 남편의 죽음이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은, 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있으면 나도 무조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없자 투자를 많이 한 사업이 망해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꽤 멋졌는데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서 한동안 매일 술을 마셨다. 많이 마셨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고, 그때에서야 비로소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무너진 삶을 일으켜야 했다. 나는 호되게 넘어지고도 늘 일어났다. 강하진 않았어도 끈덕지게 살았다. 내 삶의 형태가 그런 식이었으므로 나는 이번에도 내 스스로를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못했다.
우선은, 매일 한 시간씩 걷기로 했다. 당신과 자주 다니던 산책로였다. 당신이 있었는데 없어진 공간들을 마주칠 때마다 울음이 터졌다. 코로나로 인해 상용화된 마스크가 내 울음을 감춰 주어서 나는 부끄러움 없이 울었다.
그렇게 울면서 걷던 길 위로 어김없이 봄이 찾아들었다. 버드나무 가지가 길게 늘어진 강변에 아기오리 아홉 마리가 태어났다. 자그마한 생명체 아홉 마리가 물결을 따라 졸졸 어미오리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짤막한 주둥아리로 이제 막 솜털 같이 자라기 시작한 날개깃을 부비는 아기오리들은 몸짓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불가항력으로 멈추어 카메라를 들었다.
아. 세상에 어린것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어린것들이 어미를 좇아 세상을 배우는 모습이 뭉클했다. 나도 내 어린것을 힘껏 가르쳐야지. 산수와 국어는 물론이고 살아내는 법을, 절망을 견뎌내는 법을 가르쳐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내 어린것이 절망을 맞닥뜨렸을 때, 그건 이렇게 극복하는 것이라고, 그 순간을 극복해 내면 살 수 있고 살아서 다행인 순간들이 또 온다고
잘 가르쳐주고 싶었다.
살아있으면서 불행을 피할 순 없지만
살다 보면 행복한 일들도 참 많다고.
나는 행복한 엄마가 되어 행복한 아기를 키우고 싶어서 행복해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