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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다 Jan 14. 2024

평범하게 불행해

누구나 결핍을 가지고 산다

"이 세상에 쉬운 삶은 없어요. 자신을 특별히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우린 모두 다 평범하게 불행한 거예요."
- <마당이 있는 집>  주란이 상은에게 보낸 편지 중 발췌


이제는 몸매를 가꾸기 위해서라기보단 생존을 위해 주기적으로 운동을 다닌다. 집에서 애를 보며 운동할 시간은 없고 따로 시간 내어 애를 맡겨놓고 나와야 운동이 가능했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같이 운동하던 여자가 남편 혹은 애인과 통화를 하며 건물 밖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부러웠다. 팔자가 참 좋아 보였다. 중년에 접어든 나이인 것 같은데 늘씬하고 예뻤다.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알 수 없고, 통화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만 가능할 뿐이었지만 사소한 일상을 아무 때나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게 참 부러웠다. 남의 팔자는 다 좋아 보이는구나.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불행할까.


불행은 눈을 감은 채 낫을 휘두르는 사신이었다. 그것이 아무 때나 아무에게 닥쳐올 수 있는 줄은 알았어도 '그때'에 '나'에게 몰아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그런 것을 두려워하긴 해도 구체적으로 예상하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긴 할 것이다.

서른두 살에 애 딸린 과부라니, 평범과 무난함에서 벌써 한참이나 뒤떨어져버렸다. 나는 평범함으로부터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내 품 안엔 이제 막 세상의 빛을 본 어린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의무가 있었고 환경이 함부로 그 애를 불행하게 만들도록 놔두어서는 안 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아빠를 잃은 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불행인지는, 내가 겪어보지 않았으므로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아이에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를 알기 전에 아빠를 잃었으므로 나만큼 고통스럽거나 슬프지 않을 거라 믿었고, 그러기를 바랐다.


어느 날 아이와 함께 간 식당에서 사장님이 아이를 귀엽게 여기며 물었다. "아빠는 어디에 두고 엄마랑만 왔니?" 불쑥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당황한 나는 아빠는 집에 있다고 대답했다. 언젠가는 내 보험을 재설계하며 사망보장에 대해 관심 있게 물었더니, 보험설계사는 웃으며 "그런 건 보통 아빠 쪽에서 들던데요"하였다. 나는 이 애는 아빠가 없어 내가 죽으면 고아라고 대답할 수 없어서 그저 마주 웃는 수밖에 없었다.

결핍이 드러나는 모든 순간에 나는 주문을 외우듯 속으로 뇌까린다. 누구나 부족함을 가지고 살아가. 누구에게나 결핍이 있어. 남편을 살아오게 만들 순 없지만 그 결핍을 크고 작게 만드는 것은 내 의지로 가능한 일이다. 불행을 불행으로 인지하는 순간 불행해진다. 나는 아이가 아빠를 잃은 것을 큰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했다. 아이가 처음으로 아빠를 발음할 때, 아이의 동화책마다 아빠가 그려져 있고 내가 그것을 웃으며 읽어주어야 했을 때, 나는 아이뿐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도 내 먹먹한 기분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그 불행을 별거 아닌 걸로 받아들이면 아이에게도 '별 거 아닌 것'으로 남을 것이다.


아이 아빠의 사진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매일 밤 아이에게 인사를 시켰다. 아빠 보여줄까? 하고는 핸드폰에서 애 아빠가 30일도 안된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을 찾아 '이게 아빠고 이게 너'라고 몇 번이나 알려주었다. 아이에게 아빠가 슬픈 금기가 아니어야 했다. 산타나 요정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신비하고 따뜻한 존재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어느 때인가 문득 알 수 없이 그립더라도, 엄마 품에 안겨 아빠의 사진을 바라보던 기억이 행복했었기를.


아이에게 아빠가 없다는 게 얼마나 큰 불행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어떤 팔자 좋은 사람도 각자의 불행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것 정도만 안다. 어느 삶이나 그렇다. 내 아이의 불행은 수많은 불행 중에서도 흔하고 흔한 일일 뿐이다. 그 결핍은 내 아이에게 그저 그런 약점이 될 것이다. 아주 평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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