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갈등, 같은 공감

「딸에 대하여」 서평

by 산문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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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커서 자식 낳고 길러보면 엄마 마음 알 거야.” 출근 전, 아침 먹기가 귀찮은 나를 기어코 밥상에 앉히며 늘 덧붙이는 우리 엄마 얘기다. 자녀의 성장과 엄마의 외로움은 비례할까. 한낱 애였던 자녀가 성인이 되어 세상에 던져지고, 어머니가 살아온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겪는다. 자식은 밖에서는 그렇게 싹싹하고, 논리적이며, 똑 부러지지만, 연습해 본 적 없는 엄마와의 토론에서는 “엄마가 뭘 아냐” 식의 대화로 수렴하곤 한다. 자녀와의 빈번한 갈등에서 엄마는 어떤 생각이 들까.


딸애는 내 삶 속에서 생겨났다. 내 삶 속에서 태어나서 한동안은 조건 없는 호의와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존재. 그러나 이제는 나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 굴고 있다. 저 혼자 태어나서 저 스스로 자라고 어른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딸에 대하여, 김혜진, 민음사,2017』는 딸에 대한 엄마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평범함을 추구하는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엄마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하려고 애써왔다. 나는 공감하는 사람.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나는 응원하는 사람. 다 이해한다. 이해하고 말고. 나는 헤아리는 사람. 아니 어쩌면 겁을 먹은 사람.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깊이 빠지려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입은 옷을, 내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사람. 나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표정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사람. 여전히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걸까.


그런 평범하면서도 무난한 사람이 싸우기 시작한다. 갈등의 구조는 2가지다. (#요즘갈등, 옛날갈등) 하나는 동성애자인 딸과 그녀의 여자 친구로부터 비롯되는 갈등이다. 이야기는 딸애가 엄마의 집에 얹혀살면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중요한 꼬리표가 붙는다. 무상거주가 아닌 것. 7년 동안 만난 여자 친구와 함께 온 것. 딸애는 왜 굳이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왔을까. 한 대학은 어떤 시간강사를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부당 해고시켰고, 시간강사인 딸애는 그런 학교들 측을 상대로 꽤 오랜 시간 동안 시위에 참여해왔다. 그녀는 한동안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여자 친구와 함께 살던 집의 보증금을 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엄마에게 온 것이다.


폭탄이 터지면, 폭탄, 도화선, 불꽃 중 어떤 것의 공이 가장 클까. 엄마는 어느 날 딸애의 몸에 멍과 손톱자국을 본다. 이것이 불꽃이라면, 딸애가 시간 강사직을 버린 것은 도화선이고, 그녀가 레즈비언인 것은 폭탄이다. 엄마는 폭발한다. 네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정말 모르겠다. 서른이 훌쩍 넘은 여자애가 직장도 없고 결혼할 생각도 없고 어디서 이상한 여자애를 집안으로 끌고 온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싸움질까지 하고 다니다니, 날 괴롭히려고 작정한 게 아니면 어쩜 이럴 수 있는지. (중략) 나한테도 권리가 있다. 힘들게 키운 자식이 평범하고 수수하게 사는 모습을 볼 권리가 있단 말이다.


딸애도 지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러려니 봐 주면 안 되는 거야? 내가 뭐 세세하게 다 이해를 해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며?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며? 다른 게 나쁜 건 아니라며? 그거 다 엄마가 한 말 아니야? 그런 말이 왜 나한테는 항상 예외인 건데! 엄마는 둘의 사랑을 소꿉장난, 가족, 혼인신고, 출산을 이유로 반문하자, 딸애가 되묻는다.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하게 막고 있다고 생각 안 해?


갈등은 다른 형태로도 나타난다. 요양보호사인 그녀와 그녀가 돌보는 환자 “젠”을 두고 병원 측과 겪는 갈등이다. 엄마는 간병인으로 소속된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을 돌본다. 이곳은 환자들이 많은 비용을 부담하고 들어온 시설이고, 젊었을 때 훌륭한 일을 했던 “젠”역시 가족은 없지만, 막대한 후원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요양원 측은 “절약”이라는 명분으로 “재활용” 기저귀를 “반”으로 나눠 쓰도록 강요하고, 욕창 오른 살을 소독하기 위한 드레싱 거즈도 “잘라 쓰게” 한다.


젠은 병실을 혼자 썼다. 어느 날 새로운 환자가 왔고, 가족이 없는 젠은 병원의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밀려난다. 젠에 대한 후원금과 기부금으로, 그녀가 있어야 할 곳에 못 있고, 다른 병실로 퇴출당한다. 이를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엄마를 두고 병원 측은 냉소를 품으며 경고한다. 여사님 환자를 잘 돌보시는 건 좋은데요. 자꾸 그렇게 마음을 주시면 이일 오래 하기 힘듭니다. 계속하실 거 아닙니까? 근데 이렇게 마음이 약하셔서 어쩝니까.


알고 보니, 병원은 병실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젠을 더 열악한 병원으로 옮기려 한다. 또 다른 폭탄이 터진다. 지금은 저래도 저분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생각을 좀 해봐 처음 여기로 올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와서 잘 보살펴 달라는 인사를 하고. 정신이 말짱할 때는 자기한테도 얼마나 좋은 말을 했어. 세상에. 그런데도 이제 와서 쓰레기통에 처넣듯이 보내버리겠다니. 우리라고 뭐 다를 거 같아? 우린 영원히 저런 침대에 안 누워도 될 거 같아?


소수자를 대상으로 엄마는 왜 이쪽은 찬성하고(노인), 저쪽은 반대(동성애)할까. 노인에 대한 갈등은 고려장의 전설로부터 지금껏 구전되어 왔고, 그 결과 우리에게 보다 익숙하다. 이를 "기존의 갈등"이라 하겠다. 반면에 동성애에 관한 갈등은 과거에는 갈등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것은 일방적 금기였고, 이들은 마녀 사냥당했다. 동성애는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갈등이며, 금기에서 전환 중인 갈등이다. 기존의 갈등을 뛰어넘는 새로운 갈등, 이를 "탈-갈등(post-conflict)"이라 부르겠다. 그녀의 가치관은 한쪽에는 익숙했으나, 한쪽은 그렇지 못했다. 젠을 그토록 위하고 아꼈던 따뜻한 그녀도, 딸애 앞에서는 노여움과 괘씸함. 서운함과 야속함. 억울함으로 뭉뚱그려진 감정이 솟는다. 작가는 각각의 갈등이 익숙함의 정도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두 갈등 모두 혐오와 배제의 세계에 직면했다. 이 세계는 나와 관련이 없길 바랄 뿐이고, 쳐다보고 싶지 않은 불편한 영역이다. 어려서부터 다름과 틀림에 대해서는 수시로 배워왔지만, 다양성, 보호, 존중의 관점은 머리로만 이해되는 경향도 적지 않다.


「딸에 대하여」는 소수자가 겪는 폭력에 대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등장인물들의 작은 외침은 작지만 묵직하다 세상일이라니. 자신과 무관한 일은 죄다 세상일이고 그래서 안 보이는 데로 치워버리면 그만이라는 그 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 저 여자는 언제 어디서나 저렇게 말하겠지. 제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그 자식들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또 그렇게 말하겠지. 그런 식으로 세상일이라고 멀리 치워 버릴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둘씩 만들어지는 거겠지. 한두 사람으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크고 단단하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뭔가가 만들어지는 거겠지.


신기하게도 성소수자인 딸애의 목소리와 무연고 노인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오버랩되는데, 서로의 주장을 엇갈려 배치시켜도 어색하지 않다. 과연 이들에게만 해당될까. 혐오, 차별, 고용불안의 사회적 상처들에 적용해도 마찬가질 것이다.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다. 내 얘기가 될 수도 있는 것. 문학은 머리로만 얘기하지 않는다. 가슴으로도 말한다. 나의 얘기와 남의 얘기에 대한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그것이 공감의 첫걸음이지 않을까.


※ 긴 호흡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다니,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 다음의 색깔 적용(초록색)은 제 생각이 아닌 발췌문 및 인용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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