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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Mar 12. 2020

수영장의 추억

2020. 01. 02(목)



아, 수영장에 가고 싶다.

허안나 작가의 독립출판물 <수영 일기>를 읽다가 잠시 책을 덮었다. 처음으로 수영을 배우던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첫 수영은, 태교로 수영을 배우고 싶다던 언니를 따라간 주부반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만삭이었던 언니가 혼자 배우러 가기가 불안하다고 내가 동행해주길 바랐던지라, 나는 부모님과 같이 살던 마포구 상암동에서 수영장이 있는 올림픽 공원까지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수영을 배우러 다녔다. 처음엔 주부반이란 말을 듣고 '아줌마들이랑 수영을 배운다고? 헐...' 하는, 수강생분들과 동화되기 싫은 마음이 일었지만, 그건 당시의 내가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열정적이고, 활력이 넘치며, 장난기가 넘치시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언니 뱃속에 있던 조카가 작년에 중학생이 되었으니, 참 어리숙할 때였다. 주 3회 수영강습을 다니는 동안 '아줌마'라고 통칭되는 어르신들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뒤로, 나는 늘 주부반 수영강습 시간만 찾는 사람이 되었다. 



한 번은 수업을 마치고, 탈의실에서 몸무게를 재는데 체중계의 측정값이 이상하게 나왔다. 기계의 오류인가 싶어서 다시 쟀는데도 엉뚱한 숫자가 나오더라. 그때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뒤돌아보니 한 아주머니 한 분이 내 뒤에서 체중계의 끝을 장난으로 밟고 계시는 게 아닌가! 또 어떤 날은 두 할머니께서 서로의 바지를 실수로 바꿔 입고는 뒤늦게 바지가 바뀐 걸 알고 함께 웃음이 터지신 날도 있었다. 작은 일에도 다 같이 호탕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여고에 다녔던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니, 아주머니들이 이렇게 유쾌했던가? 나는 그날 이후로 아줌마들을 호시탐탐 관찰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그녀들은 왁자지껄 웃다가도 문화센터를 나설 때면 다시 포커페이스를 장착했는데 그런 부분마저도 관찰하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었다. 



한동안 수영장 가는 걸 잊고 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잊고 지냈어도 언젠가 다시 수영을 찾게 되더라. 결혼하고 신혼집 근처 문화센터에서 수영 강습 시간표를 가장 먼저 확인했다. 진짜 주부가 되어 주부반 수영강습을 신청해 회원카드를 발급받았을 때는 작은 성취감마저도 들었다. 물속에 온 몸을 담그는 것에 공포감을 가지고 있던 내가 이토록 수영장을 계속 찾는 이유는, 물속의 고요한 매력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호흡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물속에 몸을 밀어 넣는 그 짧은 순간에는 모든 걱정이 멈춰버린 평온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말은 거창하게 해도 언제나 자유형까지만 배우고 그만둬버리는 날라리 수강생이지만, 지금까지도 그 순간이 좋아서 언젠가 다시 수영장을 배울 생각으로 수영복과 수영모는 절대로 버리지 않고 있다. 



상세한 경험은 다르지만, 허안나 작가의 <수영 일기>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들이 가득 담겨있더라. 보았던 일화 중에 가장 하이라이트는, 한 아주머니가 수영장 안에 무화과를 몰래 싸가지고 와서 선생님 몰래 나눠 먹었던 일!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놀랄 일이지만 작가는 실제로 경험했다고 한다. 수강생 분이 작가님의 입 안에도 무화과를 넣어주었을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휴게실에서 떡이며 과일 등등을 푸짐하게 싸와서는 "학생! 학생! 이거 하나 먹고 가!"라며 입에 물려주거나 손에 들려주었던 나의 어르신 동기들도 떠올랐다. '이렇게 든든히 간식을 챙겨 드시면... 운동한 게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나요'란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챙겨주시는 게 감사해서 주시는대로 잘 받아먹었다.



마꼬도 뱃속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나. 양수 속에서 하루하루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볼 수 없으니 늘 궁금하다. 언젠가 마꼬와 같이 수영하는 날이 온다면 무척 기쁠 것 같다. 오랜 시간 끝내지 못한 접영 진도를 마꼬와 함께 나간다면 그것도 꽤 좋은 추억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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