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1. 28(화)
칼바람이 부는 날이었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그녀가 건넨 쇼핑백 안에는 내가 사기로 한 물건 외에도 지퍼락이 하나 더 들어있었다.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모빌에 다는 인형이에요, 필요하다고 하시면 드릴게요." 지퍼락 안에는 펠트지를 오려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만든 작은 인형들이 들어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태교 하는 동안 직접 만들었던 것 같다. 애정이 깃든 물건이었을 텐데, 예쁘게 잘 써줄 수 있는 사람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 외에도 아기 옷과 모자, 모유수유 팩도 덤으로 주었다. 어젯밤 그녀가 쪽지로 아기의 개월 수를 물었을 때, 아직 출산 전이라고 하니 챙겨주겠다고 한 것들이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나는 사과 상자에서 예쁜 게 생긴 사과 몇 알을 골라 챙겨나갔다. 그녀의 곁에는 패딩으로 중무장을 하고 핑크색 부츠를 신은 아기가 유아 차에 앉아 뽀얗게 웃고 있었다. 아기가 저만큼 클 때까지 그녀는 얼마나 고단한 시간을 보냈을까, 갑자기 내 앞에 있는 그녀가 무적의 전사처럼 보였다.
며칠 전부터 당근 마켓을 시작했다. 사실 당근 어플에 가입한지는 꽤 오래되었으니 다시 시작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몇 해전 작업실 동료가 안 쓰는 물건을 판매하기에 제격이라며 알려주어 가입해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준비하며 쏠쏠하게 사용했다. 덕분에 새 상품과 다름없어서 버리기에는 아깝고, 누군가가 써주었으면 좋겠다 싶은 물건들을 여럿 정리할 수 있었다. 티셔츠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크레용, 식물 화분, 옷 수납 박스 세개, 전시장에서 사용했던 이케아 테이블 두개, 옛 남자 친구가 선물해줬던 목걸이(빨리 팔고 싶어서 헐값에 내놓았다), 핼러윈 데이에 사용했던 액세서리와 머리띠, 대형견 철제 화장실 등등... 일상을 꾸리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니고, 취향이 변하면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대체로 시시한 것들이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이런 소품과 액세서리에 관심을 가져주는 젊은이들이 많은 지역에 살았기에 판매글을 올릴 때마다 거래를 원한다는 쪽지를 총알같이 받곤 했다.
그렇게 소소한 짐들을 수차례 덜어내고 지금의 동네에 이사 와서는 한동안 어플 켜기에 시들해졌다. 산자락 아랫동네라 이동이 불편해서인지 집주소를 받고는 거래를 취소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서서히 어플의 존재가 기억에서 잊힐 즈음, 마꼬가 왔고 나는 다시 당근 어플을 찾게 되었다. 맘 카페에 들락거리며 육아 템 세계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지만 도통 뭘 준비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평소에 육아와 출산 쪽으로 언니의 조언을 듣곤 했는데, 우리 조카의 나이가 올해 15살이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아기 용품 산업은 더 할 테지... 가까운 지인 중에 신생아 기르는 사람이 없었고, 고민하던 찰나 당근에 사람들이 내놓은 물건을 보고 육아에 필요한 품목을 대략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었다. 설정한 온도를 유지시켜주는 전기포트, 젖병소독기, 짱구베개, 쪽쪽이 소독기, 장난감 소독기, 물티슈 워머, 전자동 바운서... 신생아 육아의 신세계가 당근에 있었다. 하지만 여러 물건을 구매해 쟁여두고 싶은 마음이 선뜻 생기지 않았다. '육아는 템빨'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직 실전 육아를 경험해보지 못해서일까. 우리 부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아기의 짐이 늘어난다는 불편한 생각이 더 앞선다. 평소에 짐이 늘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기도 하고,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아기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는데... 아직 인사도 못해본 이의 짐을 집 안에 미리 차곡차곡 준비해둔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때마침 눈에 들어온 게 그녀가 올린 원목 모빌 거치대와 자장가가 나오는 모빌용 오르골이었다. 모빌 거치대에 오르골을 걸어두고 전원 버튼을 켜면 자장가 음악이 나온다. 오르골 하단에 고리가 있고 이게 뱅그르르 돌아가는데 여기에 모빌을 걸어두면 아기가 누워서 돌아가는 모빌을 보게 된다. 아기 침대가 있으니 모빌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부피를 크게 차지하는 물건도 아니니까. 그리고 모빌은 귀여운 아이템이니까.
집에 돌아와 당근 거래로 한아름 받은 꾸러미를 풀었다. 앙증맞은 사이즈의 옷과 모자에서 잔잔한 아기 세제 냄새가 났다. 지퍼락에서 꺼낸 인형을 모빌에 걸어보았다. 빨간 지붕 집, 양, 구름, 나무, 바둑이 강아지... 인형을 본 포카가 자기 장난감이라고 생각했는지 꽤 신나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는 ‘포카 꺼 아니야'란 말을 수십 번 듣고서야 진정했다. 아기 모빌을 침대에 달고 거래 후기 인증숏을 보내기로 했다. 포카에게 아기 침대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침대 곁에 앉는다. 언니가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니 한 번은 앉아주겠다는 표정 같았다. 그 멀뚱한 표정에 웃음이 났다. 얼마 뒤에 마꼬가 저 침대에 누워있다면 포카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챙겨주신 아기용품 너무 감사합니다. 모빌 예쁘게 잘 쓸게요! '란 메시지와 사진을 판매자에게 보냈더니 곧바로 '아기와 건강히 만나길 바랍니다!'라는 고마운 알람이 도착했다. 이런 게 아기를 기다리는 재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