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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Feb 03. 2020

같이 걸어가 줄게

2019. 11. 17(일)

오늘은 토토랑 '82년생 김지영'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는 낮동안 각자의 일정을 보내고 극장 상영 시간 전에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홍대의 모 영화관 근처 작은 밥집에서 나는 돌솥 비빔밥을, 토토는 오므라이스를 주문했다. 하지만 나눠 먹자는 핑계를 삼아 토토의 오므라이스도 거의 내가 다 먹었다. 확실히 마꼬는 오므라이스가 취향인가 보다. 






오늘을 기다리며 찾아본 영화 관람 후기처럼, 영화관에 온 사람들 대부분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더라. 나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는데, 나는 김지영 씨가 부러워서 울었다. 의지할 수 있는 친정이 있으니까. 아빠랑 남동생의 태도가 답답하긴 해도, 항상 편이 되어주는 엄마가 있으니까. 버스에서 아빠에게 마중 나와 달라는 문자 보내는 것을 보고, 그래도 의지할 구석이 있구나 싶어서. 



결혼 전, 나는 현천동이라는 곳에 살았다. 항공대학교 후문에 위치한, 가구수가 현저히 적은 동네로 동사무소도 없어서 옆 동네 대덕동사무소에서 행정처리를 대신했을 정도로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대부분 야산, 창고형 공장 건물이 많은 개발이 안된 땅이 대부분이었고, 해가 지면 가로등도 드문드문 있던 외진 동네였다. 가끔 버스에 내려 집까지 걸어갈 때 순찰을 돌던 경찰의 눈에 띄면 집까지 경찰차를 타고 갈 수 있었는데 뒷좌석에서는 경찰차의 문을 열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늦게까지 회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택시 잡기가 참 어려웠다. 현천동에 들어가면 빈차로 나와야 하는 게 뻔하기 때문에 승차거부를 당하는 게 일이었다. 간혹 현천동이 어딘지 모르는 초짜 기사님들 중에는 마포구 상암동의 끝자락을 지나 어둑한 동네로 들어갈 때, 오늘 손님을 잘못 태웠다고 짜증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고, 자기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 아닌지 외려 긴장하는 기사님들도 있었다. 



야근이 많았던 겨울은 더 힘들었다. 영하의 날씨에, 늦게까지 일을 하고 퇴근해 배차 간격이 20분씩 걸리는 버스를 타면, 졸음이 쏟아지기도 했다. 한 번은 내려야 하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국방대학교 부근 종점에 도착해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였다. 당시에는 카카오 택시도 없었고, 지나가는 택시마다 늘 그랬듯 승차 거부를 당했다. 결국 집에 있는 아빠에게 전화해 데리러 와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는데, "왜 자는 사람을 오라 가라 하냐, 걸어서 오던지, 알아서 와!"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20대 후반인 딸이 데리러 와달라는 전화에 보일 반응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전화만 그렇게 끊은 거겠지... 걸어가다 보면 차로 데리러 나오겠지!' 싶어서 어둑한 길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도로는 휑했다. 걷기 시작한 지 십 여분쯤 되었을까, 운이 좋게도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택시에 탈 수 있었다. 기사님은 자유로를 타고 돌아나가다가 이쪽 길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길이 이렇게 어둡고 험한데 아무도 택시를 안 태워줬던 거냐며 오히려 나를 걱정해주셨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요즘 사람들이 정말 나빴다고...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아빠의 차가 지나가지는 않을까 건너편 도로를 살폈지만 기대와 달리 고요했다. 나는 '나쁜 건 사람들이 아니라 내 부모입니다...'라는 말을 혼자 삼켰다. 집에 도착해보니 아빠는 자고 있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어떠한 일이 생겨도 아빠에게 도와달라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가족에게 기대감을 가지지 않게 되는 건 참 애석한 일이다. 여러 차례의 일을 겪은 끝에 '포기'라는 감정만 남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반복적인 실패와 실망의 시간을 거치며 바위처럼 단단해진 상태다. 더 이상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불필요한 것들을 보관하는 상자에 넣어 먼지 쌓인 창고 안에 밀어 넣는 것처럼, 그렇게 봉인되어 마음 한 켠의 무거운 짐이 된다. 나는 김지영 씨가 원 가족을 포기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김지영 씨의 문자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아빠의 존재가(그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참 좋았겠지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럼에도 지영 씨의 마음에 엄마와 외할머니처럼 바위처럼 보관된 짐이 차곡차곡 늘어난 게 마음 아팠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속병이 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피곤함과 억울함만을 앞세워 말할 뿐이다. 언제나 마음이 여린 사람들만 속병이 난다. 



내 옆자리에는 세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러 왔었다. 나란히 앉은 좌석 가운데에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딸이, 내 좌측에는 엄마가 앉았다. 영화를 한참 보고 있는데 그분이 울고 있단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다. 어느 장면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무엇이 저분의 눈물을 흘리게 했을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해는 되어서 영화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남편과 딸이 그분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기를 바랐다. 어렵게 택시를 타고 집에 갔던 그해 겨울,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린 나와 팔짱을 끼고 집까지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그 시절의 나는 혼자나 다름없었던 시기라서 내가 나를 다독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다 보고 토토가 고기를 사주고 싶다고 했다. 마꼬는 돼지고기를 싫어하므로, 퉁퉁 부은 눈으로 소고기를 먹었다. 토토는 '84년생 윤나리 씨, 잘 먹고 힘내'라며 잘 구워진 고기를 내 앞에 계속 가져다주었다. 밥을 배부르게 먹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토토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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