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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Feb 02. 2020

언리미티드 에디션

2019. 11. 15(금)


허안나 작가랑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구경하러 북서울 미술관에 다녀왔다. 줄여서 '언리밋'이라고도 불리는 이 북페어는 올해로 11년째를 맞았다. 언리밋은 독립출판물을 만드는 국내외 창작자들 외에 출판사들이 부스를 여는 소규모 출판 박람회다. 초창기에는 꽤 작은 규모로 열렸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규모가 제법 커져서 박람회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미술관 안에서 책(외에도 굿즈, 포스터, 엽서 등이 있지만)을 판매한다는 것이 꽤 인상적인 데다 독립출판물을 미술의 경계로 끌어온다 점이 페어에 참여하는 작가들에게 꽤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재미있는 작업물이 많은 데다 그 해 출판 제작물과 굿즈의 유행을 엿볼 수 있다. 또 여러 작가님들의 작업을 모아 볼 수 있다는 매력에 매년마다 잊지 않고 계좌 잔고를 두둑이 만들어 놓고 방문했다. 하지만 올해는 전시 준비도 얼마 남지 않았고, 북서울 미술관은 왜 그렇게 그 이름처럼 정직하게 북쪽에 위치한 것인지... 이동 시간만 해도 꽤 걸릴 텐데 사람이 북적이는 공간에 가면 금방 지칠 것 같아서 올해는 가지 말까...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안나에게서 "언니! 언리밋 갈 거야?"하고 연락이 온 것. 가야지, 안나랑 같이 가는 거면 가야지 암암.



평일이었고,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음에도 전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기 작가님의 작업이 있는 부스에는 모여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보고 싶은 책을 보려면 자리가 빌 때까지 뒤에서 기다리거나, 다른 부스에 먼저 다녀와야 했다. 보고 싶은 책이 있는데 앞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팔이 닿지 않을 때는 훤칠한 안나의 도움을 받아 책을 건네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내용만 확인하고 제자리에 도로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몽땅 다 사고 싶었지만, 예전처럼 가지고 싶은 것을 다 살 수는 없었다. 이제는 마꼬를 위해서 돈도 아껴두어야 하고, 물건을 사 오면 그만큼 공간을 차지할 테니 욕심을 내려놓아야 했다. 토토와 나, 포카 이렇게 셋이서 살려고 구한 집에 사람 한 식구가 더 늘어나는 거니까. 마꼬의 공간은 어떻게든 확보해두어야 한다.



그렇지만... 소비의 요정이 소비를 끊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 끝에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만 몇 권 데려왔다. 그중에서 드로잉 수업에 오시는 숲 선생님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서 구매한 한요 작가님의 <어떤 날 수목원>과 엄마와의 마지막 3년을 기록한 권남희 작가님의 <엄마의 계절>이 가장 좋았다. (나중에 한요 작가님의 '어떤 날 수목원'을 드로잉 수업시간에 소개했는데 숲 선생님들 모두 구매하셨다고 들었다. 뿌듯했다.)



책을 보러 다닐 때 안나와 나의 취향이 엇갈리는 점도 무척 재미있었다. 우리가 유일하게 같이 산 책은 독일에서 유학 중인 김주영 작가님(instagram.com/joo_bilder)의 책 <Unübersetzbare Deutsche Wörter 번역이 안 되는 독일어 단어들>이었다. 마침 오늘 김주영 작가님이 직접 작업을 소개하는 시간이 열려서 함께 가서 들었는데 그림이 너무 귀여웠다. <번역이 안 되는 독일어 단어들>은 말 그대로 독일어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연상되는 재미있는 이미지들을 모아, 작가님 특유의 재치 있는 일러스트 작업으로 엮은 작업물이었다. 우리는 강연을 듣고, 바로 부스에 내려가 작가님의 책을 사고 사인도 받았다.



곁에서 일행이 좋아하는 것을 지켜보다 보니 내가 지나치고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도 했다. 안나는 정말 안나가 평소에 해오던 작업과 같은 결의 이미지를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마치 자신이 그린 그림은 자신을 닮는 것처럼. 흉내 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이, 마음 놓고 서로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한바탕 소비를 끝내고 메밀 전문점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올해의 언리밋은 몹시 지칠 줄 알았는데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기운이 펄펄 나더라. 예쁜 작업물들을 보고 와서인지 작업 의욕도 샘솟았고, 묵직한 가방을 들었음에도 여느 때보다 기운이 났다. 동행한 친구가 있어서 더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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