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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Feb 02. 2020

묘하게 통쾌했던 하루

2019. 11. 14(목)

직장생활을 하다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와 디자이너로 독립해 일한 지 9년 차가 되어간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프리랜서라고 소개하면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러움을 사곤 하지만, 작업하는 시간만 홀로 보낼 뿐, 일러스트 일과 디자인 일 모두 프로세스 중의 일부분이라서 늘 '협업의 과정'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갑에게서 무리한 요구를 받는다고 느끼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나의 입장만 전달하는 것보다 전체의 스케줄이나 상황을 보고 의견을 전달하면 일이 잘 해결되곤 했다. 그렇게 '어쨌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고, 그래서인지 일을 맡겼던 곳에서 또다시 연락을 주시곤 했다.



그런데 올여름, 이변이 일어났다. 전부터 의사소통 때문에 꽤나 신경을 쓰게 했던 곳이었다. 그간 여러 건의 일을 함께하며 컨펌은 부디 메일로 부탁드린다고 거듭 부탁드렸음에도 담당자는 자신이 바쁘다는 핑계로 매번 모든 의사결정을 구두로 전달하고 싶어 했다. 텍스트가 아닌 전화통화로 컨펌 내용을 전달을 받다 보니, 어쩔 때는 담당자가 자신의 말에도 헷갈려했다. 그에 따라 나는 적잖은 스트레스를 겪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번에는 견적을 전달하는 방식에서도 예의가 없었다. 좋아하는 분야의 일이었기에 제작비가 부족하다는 사정을 알고 일을 수락했지만, 작업 리스트를 사전의 협의 없이 추가로 덧붙였다. 그 외에도 유독 이번 여름에만 여러 가지의 크고 작은 문제로 마찰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을 당장 그만두고 싶었으나, 담당자가 미운만큼 더더욱 티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약속했던 일을 일정 내에 모두 마무리 지었고, 담당자에게 이 일을 끝으로 더 이상 일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담당자도 나의 의견을 존중하며 앞으로 일을 맡기지 않겠다고 알려왔다. 



그런데 오늘, 그 담당자에게서 견적을 알려달라는 메일을 받았다. 일을 의뢰하려는 게 아니라 비교 견적을 쓰시려는 모양이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물어보는데 답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하고 견적서를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더라. 



마꼬를 만난 후로 적당히, 억지로 하던 모든 것을 멈추었다. 몸이 축축 쳐지고 피곤하니까 마음이라도, 안 겪어도 될 스트레스와 멀리 떨어트려 놓고 싶었다. 언제나 결심은 해봤어도 실천하기는 어려웠던 부분인데, 고민의 여지없이 실행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마음의 안정이라도 절실히 원할 정도로 때때로 몸의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일 거다. 나는 왜 그동안 함께 있으면 마음이 불편한 사람과 시간을 보냈을까, 거절도 반박도 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척을 하고, 웃어주고, 감흥 없는 곳에 가고, 대충 아무거나 먹으며 보냈던 시기를 보내며 왜 괜찮다고 했을까... 그것을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나를 존중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내가 상대를 존중하는 만큼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에게 감정 소모를 할 바에야 차라리 그 돈은 안 벌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답메일을 보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지난 프로젝트 때 담당자와의 협의로 더 이상 일을 받지 않겠다고 했으므로 견적도 알려드릴 수 없다고 짧게 답했다. 그 후로 그분에게서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새로운 배움을 터득한 기분이었다. 묘하게 통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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