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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Oct 14. 2019

엄마의 남편

1984년생 엄마가 2014년생 아이에게

엄마에게는 회사 상사 같은 남편이 하나 있어. 늘 점검하고 체크하는 그런 성격 있잖니. 엄마는 신세대 시어머니를 만난 덕에 마음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았는데, 엄마 남편이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것도 같아. 이 남자의 꼼꼼하고 섬세한 모습이 멋져서 반해서 결혼했더니 원. 엄마의 남편은 이른바, ‘FM man’이거든. 정석대로 한다는 Field manual이라는 의미인데 주로 “FM대로 하네”, “FM이네” 따위로 쓰이는 표현이지. 이런 성격이 직장생활은 잘해. 가정에서 본인만의 ‘매뉴얼’을 갖다 대는 순간 곤란해지지만 말이야.    

 

교과목으로 따지자면 내 남편은 과학/수학 머리고, 엄마는 국어/미술 쪽이지. 남편은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 모두 전자 분야인 반면, 엄마는 학창 시절 내내 문예부 활동을 하다가 대학에서는 광고홍보학을 전공했어. 남편은 R&D(기술개발) 직무를 10년 가까이하다가 최근 ‘개발구매’라는 부서로 이동했는데, 엄마는 아직도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몰라. 기술 개발할 때엔 뭐 TV나 휴대폰 같은 전자제품 전원을 개발한다고 하던데, 전원이라는 건 그냥 눌리면 켜지는 거 아닌가? 얼마 전에는 SD카드 같은 걸 주면서 미니 태양광이라며, 햇빛을 받으면 에너지가 생긴다고 설명하더라고.

“어? 이런 거 어디서 봤는데” 엄마는 반색하며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그 답을 찾았지.

“이거, 자동차에 있잖아. 햇빛 받으면 인형 얼굴 까딱까딱하는 거.”

남편의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리며 순간 얼음 상태가 되더라.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엄마의 유식함을 칭송하며 “이거 선물로 가져” 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진 않았어.      


엄마가 이 남편이라는 생명체와 전혀 다른 뇌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네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야. 2013년 겨울, 작은 빌라를 신혼집으로 구했지. 남편과 그의 친구가 이삿짐을 함께 날랐는데, 많지 않은 살림살이 중 몸집이 가장 큰 녀석이 남편의 아버지가 결혼 선물로 짜주신 장롱이었어. 남편과 그의 친구는 끙끙대며 장롱을 옮기다가 안방 문 앞에서 잠깐 멈추더라. 직접 제작한 장롱이었기에 기성품보다 장롱 높이가 높았거든. 안방 문을 지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둘이 토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지. 둘은 줄자와 펜을 가지고 오더니 장롱 높이와 깊이 등 이리저리 재는 것 아니겠니?아니, 일단 옮겨보면 될 거를 뭘 한담. 종이에 무언가 계산하더니 둘 다 동시에 “되겠네!” 소리치고 그제야 장롱을 비스듬히 눕히고선 안방 문을 통과하는 거야. 종이 위에 적힌 건 바로 ‘피타고라스의 정리’였어.


남편과 엄마는 어릴 적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했던 공통점이 있어. 다만, 남편이 선풍기나 라디오를 뜯었다면, 엄마는 자연에서 주워온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이용해 엽서를 만들었다는 점이 달라. 엄마가 초등학생 때에는 방학 때마다 ‘탐구생활’이라는 숙제를 해야 했어. 만들기, 글짓기, 실험 등 주제가 정말 다양했는데 개학을 앞두고서야 온 가족이 총출동해야 하는 ‘벼락 생활’을 매년 겪었단다. 욕심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 ‘탐구생활’ 책자가 얼마나 두꺼워졌는지 눈치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지. 얼마나 많은 사진, 자료, 유의물을 책 안에 붙였느냐에 따라 점수가 갈렸으니 말이야. 또 하나, ‘그림일기’도 방학의 필수 숙제였어. 매일 써야 하는 두 달 치 그림일기를 일주일 만에 몰아서 써야 하니 혼자서 가당케나 하겠니. 엄마들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등 편법이 횡행했지. 물론, 네 외할머니도 게으른 초등학생 딸 때문에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셨는지 몰라.    

 

한 남학생이 있었어. 중학생인 그는 가정 과목 숙제로 바느질을 하고 있었지. 이 남학생의 엄마는 바느질하는 아들 모습이 힘들어 보여서 그만 “엄마가 해줄까?” 물어봤어. 이 남학생,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되물었지.


“내 숙제를 엄마가 왜 해요?”


남학생의 엄마는 왠지 창피한 기분이 들어 대답도 못한 채 돌아섰대. 이 꼿꼿하신 남학생이 훗날 엄마의 남편이자, 네 아버지가 되었네?    


엄마는 네 아버지랑 살면서 사람이 왜 이렇게 빡빡할까, ‘뭐 어때’ 어깨 으쓱 한 번 할 일도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까, 싶었어. 걱정도 많고 말도 많고 '또 시작이네' 싶을 때는 대답도 안 했지. 친구들과 “6시에서 7시, 그쯤 보자.”라고 약속하는 엄마에게 7시면 7시, 7시 30분이면 7시 30분이지, 6시에서 7시가 대체 뭐냐고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 네 아빠야. 데이트를 하다가도 “거기 말고 여기 가볼래?” 갑작스레 계획을 바꾸는 것도 싫어하고, 특히 개인적인 일정을 하루, 이틀 전에 얘기하는 건 질색하지. 그러니까 네 아빠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야 안심을 하는 사람이야. 엄마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며, 심지어 네 아빠가 당장 내일 해외 출장을 간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거든.     


회사 상사랑 산다느니, 시어머니랑 산다느니, 농담 반 진담 반 해가며 스트레스받던 엄마가, 나와 정 반대쪽에 있는 현실주의자 내 남편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건, 이 남자의 일을 이해하면서부터야. 더 정확히 말하면, 일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네 아빠는 개발자이자 기술자이나 엔지니어로 지금까지 살아왔어. 설계에 한 치라도 오차가 생기면 ‘실패’로 즉각 이어지고, 이는 곧 손실을 뜻하지. 실수나 오차를 최소화해야 하기 위해 언제나 체크하고 점검하고 확인해야 해. 예측 불가능하다는 건 바로 사고를 의미하는 거야. 반면, 엄마는 창의성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는 성격의 일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어. 증권사에서의 고객 응대, 교육 기획, 교육 진행, 강의, 글쓰기 등은 유연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 하지. 빽빽한 매뉴얼이 엄마를 숨 막히게 한다면, 네 아빠는 이 매뉴얼이 없으면 불안한 거야. 우리는 대개 성격에 따라 일을 선택하지만, 일을 둘러싼 환경 또한 개인의 성격을 형성하기도 한단다. 내 남편의 '일'을 통해 남편이라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야.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했던 ‘9.11 테러’ 때  쌍둥이 빌딩의 첫 번째 건물에 비행기가 1차 충돌하고, 두 번째 건물에 비행기가 2차 충돌하기까지는 약 16분 정도 시간차가 있었다고 해. 첫 번째 건물 상층이 붕괴되면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두 번째 건물의 비상구는 대피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아수라장이었지. 그때 이런 방송이 나와. “화재가 난 곳은 본 건물이 아니라 옆 건물입니다. 본 건물은 안전하오니 자리로 돌아가서 통제에 따라 주십시오.”


이 순간 생사를 가른 건 그들의 평소 성격이었대. 매사 낙관적인 사람은 ‘별일 아니야’ 하며 사무실로 돌아갔지만, 평소 무언가를 의심하고 사소한 것도 잘 따지며 걱정 많은 사람들은 신속하게 건물을 빠져나온 거지. 이 관점에서 보면 ‘좋은 게 좋은 거지’ 털레털레 사는 엄마를 지켜주는 건 ‘어유, 저 소심이, 어유, 저 밴댕이’라고 흉보는 네 아빠 성격인 건가?     


성격은 다르지만 성향이 비슷한 덕에 죽네 사네 하면서도 엄마, 아빠는 같이 사나 봐. 포차에서 소주 마시는 거 좋아하고, 바다를 좋아하며, SF영화를 즐겨 보지. 공포영화는 둘 다 절대 안 보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예뻐해. 재미있게 본 예능이나 다큐멘터리를 상대에게 추천하면 역시나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해. 어제 영화보고 펑펑 울었다고 고백하는 네 아빠의 감성이 좋아. 무엇보다 미세방충망을 스스로 설치하고, 엄마의 독서등이나 망가진 캐리어, 노트북 등을 고쳐주고, 캠핑용 테이블이나 조명을 만드는 모든 행위를 치킨 한 마리로 퉁 칠 수 있다는 게 크나큰 장점이지. 얼마 전에는 오랫동안 안 쓰던 시계를 고치러 시계방에 갔더니 리튬 배터리가 다 녹았다고 수리비용이 15만 원이나 든다는 거야. 네 아빠는 역시나 치킨 한 마리로 엄마의 시계를 고쳐주었지. 엄마는 아빠를 위해 뭘 해주냐고? 네 아빠 회사에서 매년 가을마다 열리는 ‘온 가족 걷기 행사’ 때 치밀한 기획 아래 쓴 엄마의 ‘칭찬 엽서’가 1등으로 뽑혀서 30만 원짜리 자전거를 얻어줬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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