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자주 희망을 이야기하곤 했다.
'행복', '사랑' 만큼이나 자주 입에 오르내리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단어가 나는 '희망'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마에게 희망은 추상이라기 보다는 이벤트였다.
- 이번 주말에 가서 먹을 고급 중국집의 깐풍새우
- 다음 달 개강 때 입을 새 옷 쇼핑
- 내년 휴가에 떠날 유럽 여행
- 연말에 있을 동창들과의 모임
기대되는 이벤트들을 엄마는 희망이라고 불렀다.
- 엄마, 지금 우리 형편에 유럽을 어떻게 가.
K 장녀로서 철없는 엄마에게 이렇게 조언이라도 할라치면,
- 그럼 희망이 없잖아.
라고 대답하는 엄마였다.
와, 정말 철이 없다. 유럽 여행이 희망이라고?
희망은 뭔가 더 숭고하고 높고 깊은,
그러니까...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그...
암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런거 아닌가?
성스럽고 철학적이고....그런거.
지금 나의 희망은
연필 한 자루 이다.
휴가가 끝나고 사무실에 출근해서
쌓여있는 일들을 하나씩 이면지에 적어내려가며
머리속에 집어넣는 작업을 할 때 쓸
새 연필 한 자루.
나는 나의 희망을 두 종류나 구비해두었다.
2HB 와 HB.
2B 연필은 심이 너무 물러서
큰 아이가 꾹꾹 눌러 쓰면 바로 부러져버리는 것이었다.
2B 는 스케치 용이구나.
알록달록한 2HB, 새까만 HB.
한 자루 씩을 출근용 가방에 넣어두었다.
새 연필을 뾰족하게 깎고
흰 종이에 사각사각 써내려가는 새 날의 시작.
출근하는 일이 기다려지고
쌓여있는 일도 하고 싶어진다.
연필 한 자루가 가져다 준 부푼 마음이다.
엄마의 희망도
그녀의 하루 하루를 버티게 해 주었겠지.
연필로 찾아온 희망이 사그라들고나면
새로운 희망이 고개를 든다.
그것은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일수도,
아직 끄지 않은 트리의 전구불빛 일수도 있다
작심삼일, 이 아니라
희망삼일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아무에게도 인정받을 필요없는 나만의 희망
하루를 살기 위한
아주 작은 희망 조각 하나.
그 한 조각으로 힘을 내어
오늘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