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를 먹고 한식을 먹다 (호크니 특별전)

by 나로살다

이번에 깨달았다.

얼마나 더운지가 문제가 아니라,

더운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가 관건이라는 것을.


몸의 열을 충분히 식히는 구간이 없이 (한국에서처럼!!)

지속적으로 더위에 노출되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그것은 나의 최애 도시 파리의 아름다운 경관도

기가막힌 빵과 와인과 푸아그라로도 커버되지 못하는

심각한 힘듬이었고


결국

나는 난생처음

더위를 먹었다.


처음엔 내가 더위를 먹은 건지 몰랐다.

기운이 하나도 없고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 같고

눈 앞이 빙빙 돌았다.


- 언니, 그거 더위 먹은 거야.

- 어? 그런거야?

- 응. 딱 증상이 그거네.



와...

더위 먹는다는게 무서운 거구나...



한국에서부터 열심히 서치해서 예약한

미슐랭 원스타 식당에 가서 한 스푼도 입에 대지를 못했다.

아름다운 플레이팅과 세련된 인테리어,

서버의 멋들어진 설명도

더위먹은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예쁘고 맛있어 보였던 엉트레.. 미안해 못먹어서.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숙소에 가 눕고만 싶었지만,

포기할 수 없던 것.


루이비통 파운데이션의

데이빗 호크니 전.



루이비통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포함하여

엄청난 수의 작품이 전시된다며 들썩였던 전시였고

프리미엄 액세스 권까지 준비해놓은 터라

나는 회사 생활 20년동안 갈고 닦은

정신력과 인내심을 십분 발휘하여

호크니 할아버지의 세계를 구경하러 갔다.



솔직히, 금방 끝날 줄 알았다.

한시간 정도 보고 숙소로 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건물 3개층을 꽉꽉 채운 초대형 규모의 전시였다!


수많은 다양한 시도와 재기발랄한 컬러감 등이

눈을 즐겁게 했다.(더위를 먹은 중에도!)


모네의 정원이 생각났던 발랄 연못과 귀여운 빗자국
오페라를 그린 호크니, 공감각적인 공간

역시 예술이란 건

테크닉보다는 표현하고자 하는 나만의 시선, 감각이구나. 싶었다.

한 눈에 내 눈을 사로잡고, 뭘 말하려는 건지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작품들이 많았고,


'그래, 사족은 다 떼어버리고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되지! 너무 고민할 필요가 없는거야 첨부터.'


라는 생각이 그림을 보는 걸음마다 들었다.

속이 뻥 뚫리고 머릿속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특히 마지막 전시관에서 오페라를 그린 시도는 전대미문의 예술 형태였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더 이상 예술혼만으로 버틸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굿즈에 환장하는 내가!

10분만에 쇼핑을 끝내고 벤치에 앉아서 동생을 기다렸다는 것이

나의 컨디션이 얼마나 바닥이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작품이 좋긴한데..언제 끝나나....


한계에 다다른 정신과 육체를 부여잡고

우버를 타고 숙소에 다다랐다.

퇴근길의 파리는 얼마나 막히는지,

창밖으로 보이는 저명한 세느강과 에펠탑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10분을 보면

꼴보기 싫은 법이다.


- 아오, 왜케 막혀어어!!


그리고 내가 몸이 안좋으면

만사 다 귀찮고 짜증인 것이다.



겨우 숙소에 도착하여 찬물에 샤워를 하고

속이 너무 비어서 더 구토감이 나는 것 같아

햇반을 돌려 김에 싸서 조금씩 먹어 속을 달랬다.


선풍기 바람 앞에서 두시간 정도 쉬고 나니

아주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시간은 8시 40분.


저녁 식사를 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이렇게 녹초가 되었을 땐,

무조건 한식이다.


- 야, 삼겹살 먹으러 가자.

- 와우!!! 콜콜



13년전 파리에서 살 때 자주갔던 한식당을 찾아보니

아직도 영업중이었다.

우버를 불러 타고 행복한 마음으로 '만나'로 향했다.



웅장한 한식당 간판



- 된장찌개랑 삼겹살 먹자.

- 언니, 나 냉면도 먹을래.

- 먹자 먹자. 아오 살려주세요~~~~




한국에 비하면 아쉬울 수 밖에 없는 맛이었지만

그래도 꿀맛이었다.

쌀밥과 된장찌개와 삼겹살과 상추쌈이라니.

그야말로 살 것 같았다.



여행은 컨디션 관리가 80% 이상이니

하시라도 위기가 찾아오면

아무것도 망설이지 말고

한식을 먹어줘야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식 먹기가 좀 그렇다, 라든지,

이 돈내고 먹기는 너무 비싼데? 라든지 하는 생각은

소탐대실이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내가 좋은 컨디션이어야

여기까지 온 의미가 있다.

기분이 좋아야 더 잘 흡수하고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고

파리에 왔으니 무조건 빵을 들이켜야지 하다가

결국 탈이라도 나면

이 무슨 해괴한 경우란 말인가.



결론은,


한식 만세.

밥이 보약이라는 진리.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지혜의 말.




파리에서

확실하게 느꼈다.





파리에서 더위를 먹다니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