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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May 20. 2022

우리 집이 사라졌다

독립의 시작

프랑스 파견 중 일 때였다.


- 통화 가능하니?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용건이 있을 때만 먼저 연락하곤 했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사무실에서 전화를 했다.


- 응 엄마, 무슨 일 있어?

- 어....그래, 잘 지내지?

- 어~ 난 너무 잘 지내~ 주말에는 그림도 그리러 가고 완전 맛있는 것도 먹었어!

- 음음, 음음...


한 귀로 들어가 다른 귀로 나가는 내 말들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 무슨 일인데 엄마?

- 아...저.. 그... 엄마가 벌써 내후년에 정년이더라구?

- 응 그렇지

- 음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교사들은 그... 서로 전배 신청을 할 수가 있는데 ... 엄마가 제주도에 가게 됐네?

- 엉? 왠 제주도? 전배는 사는 지역 근처로 가는거 아냐?

- 아, 꼭 그런 거는 아니고, 갈 수가 있어.

- 그럼 제주도 학교로 가는거야?

- 응. 그렇게 됐네?


그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

왜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지,

왜 갑자기 제주도로 가게 되었는지,

나와는 무슨 상관인지,


함께 따라와야 하는 설명과

전화를 하게 된 '본론' 을 짐작하고 질문해야 하는 건 나의 몫이었다.

엄마는 껄끄러운 상황이 되면 몇 가지 문장만 던져 놓곤

입을 닫아버리곤 했다.

말이 짧다는 것은 뭔가가 더 있다는 것이다.


- 아....잘 됐네! 제주도 좋잖아~

- 그르게~ 그렇게 됐네?

- 언제 가는데?

- 학기가 3월에 시작되니까 그 전에는 가서 이것 저것 준비를 해야지?

- 그럼 2월에?

- 아아니~~ 그 때 가면 늦지, 미리 가야지~ 준비할 것들이 많고 아주 복잡하더라구~

- 그럼 나는?어디로 가?

- ......글쎄, 그래서.


엄마의 대답은 늘 엉뚱했다.

대답을 들으면 내가 뭐라고 질문했는지 다시 떠올려봐야 할 만큼 동문서답이었다.

엄마가 제주도로 가면 나는 어디로 귀국해야 하냐는 질문에

엄마의 대답은


- 글쎄, 그래서. 였다.


뭐가 글쎄, 고 뭐가 그래서, 인가?


엄마와 30년을 넘게 같이 살았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화법인데, 한계령 미시령 고개 또는 죽어라 복잡하게 꼬아놓은 미로처럼 단순한 사실을 이렇게 접고 저렇게 가리면서 상대가 어렵게 어렵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듣도록 유도하는 아주 진빠지는 방식이었다.

담백하게 툭, 이야기 해버릴 배짱이 엄마는 없었다.

 

 - 집에 있음 답답해서 드라이브 하고 올께.


이런  말 조차도 그대로 할 용기가 없던 그녀는


 - 나갔다 와야돼 이따가.

 - 주말인데 어디?

 - 어, 강의 준비하는게 있어서

 - 무슨 강읜데?

 - 어 자료 조사도 해야 하고 할게 많네?

 - 어디로 가는데?

 - 글쎄.


나와의 스무고개에서 식은땀을 흘리곤 했었다.

더듬고 당황하는 모습이 빤히 보이는데도 끝까지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 않던 엄마.


적응은 안되지만 익숙하기는 하여

나는 순식간에 한 줄로 엄마의 메세지를 정리할 수 있었다.


'엄마는 너 오기 전에 떠나니 네가 살 집을 알아봐라.'



- 아 그러면 내가 집을 알아봐야겠네.

- 그럴수 있겠니?

- 아니 다 결정된 거 아니야?

- 응 발령은 났지....

- 그럼 살 집을 구해야지 뭐 어떡해?

- 네게 미안해서...



일은 다 저질러 놓고 뒤늦게 눈치를 본다.

내가 서운하다고 어쩌라는거냐고 한들 제주도를 안갈 엄마도 아니면서, 마치 네가 싫다면 나는 취소할 각오가 되어있는 것처럼 말한다. 각오는 되어있지만 이미 발령이 나서 어쩔 도리가 없어서 엄마도 괴로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 이렇게 되버렸어. 꼭 이러려고 한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하 참. 어쩌지? 어쩔까? 네가 말해봐.


엄마의 이런 패턴을 공히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피끓는 20대에는 엄마가 이럴 때마다 정면 충돌 하기도 했다.

- 아니 왜 말을 똑바로 안하고 늘 남탓을 해?

   솔직히 말을 해. 얄팍한 거짓말 하지 말고.

   사실을 말해야 내가 이해를 할 거 아니야.

   엄마가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말이 돼? 무슨 소리야 대체? 앞뒤가 맞아? 등등등


그런 나의 열폭은 엄마의 무대응으로 잠잠해졌고

30대가 되었을 때 나는 휴전을 선언했다.


- 엄마 나 서른살이야. 내 걱정은 하지말고 엄마 하고 싶은대로 살아. 준비 잘 하고. 엄마가 정년 앞두고 하고싶은 걸 찾아서 다행이네. 그래요. 잘 지내고. 또 연락하자.


나는 엄마가 더는 이상한 고민으로 요상한 말을 지어내지 않기를 바라며,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완벽하게 해주었다. 듣고 싶은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엄마는 그제서야 준비한 말을 차분하게 했다.


- 그래, 일이 이렇게 되어서 네게 미안하구나. 잘 알아보렴.


그렇게 엄마는 자가용에 엄마가 필요한 짐만을 챙겨서 제주도로 떠났다.

4인 가족이 살던 집의 수많은 하찮은 살림들 - 버릴수도 없고 자리만 차지하는 가족사진 액자와 앨범들, 오래된 식기와 이불들 등등- 은 나와 아빠의 차지였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후 내 짐을 빼 전세집으로 옮기기 위해 들른,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은 전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야말로, 홀연히, 우아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독립했다.


그 때의 기분을

'시원섭섭' 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순 없을 것이다.


오래된 짐을 밤새워 정리하며 맘속으로 수많은 욕을 했지만


그래도,

드디어,


내 인생에 나만 있게 된 것.


그것은 기적이고 해방이고,


대한독립만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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