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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칠 Jun 30. 2019

잠을 못 자는 한 여자가 있다.

190614/22:54

여자의 이름은 임주관, 두 명의 자식이 있는 엄마이다. 한 남편의 아내이며, 강아지 3마리와 고양이 2마리의 주인이다. 여자에게도 엄마가 있다. 주헌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의 엄마는 여자를 포함한 세 자매를 홀로 키웠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 엄마는 세 자매를 하나라도 더 먹이고 하나라도 더 입히기 위해 부지런히 일을 했다. 고된 일에 몸져누워서도 딸들을 생각하며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세 명의 딸을 둔 엄마이기에 가능했다. 엄마라는 이름의 굴레가 엄마를 강하게 만들었다. 여자의 엄마는 이제 모두에게 할머니라고 불리는 나이가 되었다. 여자는 할머니가 된 엄마가 더 이상은 고생 없이 편안하게 살았으면 한다. 그저 본인만을 위한 나날을 보내며 말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전히 자식들을 걱정한다.

 할머니는 힘들어도 자식들을 위해 올해도 깨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고생한 만큼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할머니는 믿는다.

 여자는 답답하다. 여자가 원하는 건 팔순이 넘은 엄마가 뙤약볕 아래 고생하며 키운 깨가 아니다. 그저 여자가 사 온 깨로 맛있게 간이 된 저녁밥상이 깨끗이 비워지는 것을 바란다.

 거실에 앉아 참외를 깎던 여자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할머니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엄마, 올해 깨 농사는 안 할 거야. 나도 이서방도 일이 바빠서 안돼."

 여자의 말을 들은 할머니는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누가 도와달라디. 혼자라도 지을 거야. 다 지어서 노나 먹으면 좋잖어. 인천 막내 집에도 하나 보내고, 내 아는 서울 목사님헌테도 하나 보내고."

 할머니의 말에 울컥 화가 치민 여자가 소리쳤다.

"그 말만 몇 년째야! 혼자 한다면서 결국 우리가 다 하는 걸. 올해는 말도 꺼내지 말어! 누구 다 퍼다 줄라고 깨 농사 지어?"

 갑자기 들려온 큰 소리에 깜짝 놀란 할머니도 화가 났다.

"왜 또 소리를 지르고 그런디야! 나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일이나 하면 되잖어! 그냥 내가 알아서 한다니께."

 누구도 본인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팽팽한 신경전이 계속된다.


 할머니는 결국 올해도 깨를 심었다. 여자는 뜨거운 햇볕 아래 홀로 깨를 심는 할머니를 봤다. 받는 이들은 저 깨가 어떤 수고로 만들어지는지 알까? 음식의 주재료도 아닌,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그저 그런 깨 쯤으로 생각할 테지. 자신의 몸을 아까지 않는 할머니를 보며 여자는 화가 났다. 동시에 안타까웠다.

 여자는 학교 급식소에서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할머니를 따라 농사를 도왔다. 쌓여가는 집안일에 퇴근을 하면 기다리는 농사일까지, 몸은 고되지만 홀로 농사일을 하고 있는 할머니를 모른 척할 수는 없다.

 한 해 그리고 두 해가 더 지났지만 할머니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덩달아 여자는 지쳐갔다. 여자는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본인의 몸을 생각하라며 화도 내고 타일러도 봤지만, 대답뿐이었다.  

 할머니는 매사 짜증을 내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 일이 고되 그러려니 하지만서도 여자와 말다툼을 하는 일이 많아지자 할머니도 지쳐간다. 일을 도와주는 여자에게 고맙고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지금껏 해오던 일을 그만두고 땅을 놀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잠을 설친다. 작은 소리에도 쉽게 일어난다. 어둠 속 작게 반짝이는 빛에도 눈이 부시다. 가족들은 그런 여자를 위해 밤이면 모든 소리를 죽이고, 모든 빛을 막았다. 여자는 고요 속에 가만히 누웠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한 남편의 아내이다.

나는 두 아이들의 엄마이다.

나는 엄마 주헌신의 딸이다.

또한 나는 그저 나일뿐이다.

나는 내 남편의 아내로서도, 두 아이들의 엄마로서도, 우리 엄마의 딸로서도 충실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과연 임주관이라는 한 여성으로서도 충실하게 살고 있을까?

 여자의 마음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여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임주관이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결혼하고 첫 째가 생긴 이후로 여자는 임주관을 찾지 않았다. 바쁜 현실에 치여 임주관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덩그러니 내버려 두었다. 이 긴 세월 동안 홀로 자리를 지켰을 임주관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사무쳤을까. 마음속의 임주관이 한껏 목멘 소리로 여자에게 말했다.

"고마워. 나를 찾아주어 고마워."

 여자는 울었다. 임주관도 울었다. 어느덧 가슴의 통증은 사라지고 입가엔 슬픈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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