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와 최후의 사이
개봉 당시 극장에서 <인터스텔라(2014)>를 봤다. 시간 가는 줄 알면서 보긴 했으나(조금 지루했다는 뜻이다) 재미있게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데 뭔가 개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멜리아 브랜드(앤 해서웨이)는 사랑하는 사이였던 에드먼즈 박사가 머무는 행성으로 가자며 뜬금없이 사랑 타령을 하고(결국 이 행성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보여 아멜리아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쿠퍼 박사는 그토록 그리던 딸과의 교신에 성공해 지구인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 인류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서 어마 무시한 스케일의 우주 탐험을 한 끝에 도달한 결론이 사랑이라니... 좀 맥 빠졌다. 종교도 멜로도 아닌 과학 영화여서 더 그렇게 느껴졌나 보다.
인터스텔라의 배경은 2067년 지구다. 갑작스레 닥치는 거대한 모래 태풍으로 일상적인 생활이 힘들어지고, 작물 대부분이 병해충에 걸려 식량이 부족해졌으며, 대학에 진학하는 극소수 사람 외에는 농업에만 종사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버티고 있다. 똑똑한 나사의 과학자들은 이미 인류가 살만한 행성으로 12명의 선발대를 보냈고 그중 유력한 후보지 3개를 선정했다. 이후 주인공들의 선택과 인류의 운명은 영화를 보면서 확인하면 될 것이고(워낙 유명한 영화여서 설명은 생략한다. 못 보시분은 직접 보시길), 이 글에서는 2067년 인류를 먹여 살리고 있는 옥수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영화에서 상정한 인류 최후의 작물은 옥수수다. 왜 옥수수일까? 옥수수에 어떤 특징이 있기에 최후의 작물이 되었을까.
먼저 재배적 특성이다. 옥수수는 벼, 밀과 함께 세계 3대 작물 중 하나로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옥수수는 다른 작물에 비해 재배하기가 쉽고, 기계를 사용하기가 용이하다. 씨앗이 커서 파종기로 심을 수 있고, 키가 크고 줄기가 단단해 병해충 방제도 기계로 하기 편하다. 병해충도 다른 작물에 비해 적은 편이지만, 옥수수 껍질이 옥수수를 단단히 싸고 있어 농약이 적게 묻는 것도 장점 중 하나이다. 토양을 가리지 않는 편인 데다가, 비료를 흡수하는 능력이 좋아 땅을 깨끗하게 해 준다. 생산성 역시 3대 작물 중 가장 높다.
두 번째는 다양한 활용 능력이다. 옥수수를 따고 남은 옥수숫대는 동물의 사료가 되기도 하고, 옥수숫대와 줄기 잎 등은 비료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따로 가공할 필요도 없이 그냥 땅 위에 올려놓으면 알아서 썩는다. 멀칭도 되고. 옥수수수염은 차로 마실수 있고, 옥수수 껍질은 공예품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옥수수는 버릴게 하나도 없는 작물이다.
옥수수는 사람이 먹기도 하고(쪄서 먹기도 하고, 팝콘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고), 동물 사료로도 이용하고, 기름을 짜서 사용하기도 한다. 근래 들어서 옥수수는 다양한 형태로 음식에 첨가되기 시작했다. 마이클 폴란은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옥수수가 현대 식품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을 치킨너깃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치킨 너깃은 옥수수 덩어리이다. 치킨 너깃에 쓰인 닭은 어떤 닭이냐에 상관없이 옥수수에서 나왔으며, 다른 구성 요소 대부분도 마찬가지다. 접착제 역할을 하는 화공 옥수수 전분, 코팅용 반죽에 들어가 있는 옥수수 가루, 튀길 때 쓰는 옥수수기름, 효모, 레시틴, 모노글리세리드, 디글리세리드, 트리글리세리드, 너깃을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하는 금빛 착색제, 그리고 너깃을 '신선하게' 유지시켜주는 구연산조차도 모두 옥수수에서 비롯되었다.
치킨 너깃을 먹을 때 함께 마시는 거의 모든 청량음료 역시 옥수수 덩어리다. 따라서 치킨 너깃을 먹으면서 음료수를 마신다면 여러분은 옥수수에다 옥수수를 먹고 있는 셈이다. 1980년대 이후 슈퍼마켓에서 파는 거의 모든 탄산음료와 과일 주스는 고과당 옥수수 시럽(high-fructose corn syrup)으로 단맛을 내고 있다. 따라서 이런 음료의 주성분은 물을 제외하면 옥수수 감미료이다. 청량음료 대신에 맥주를 집어 든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옥수수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맥주 역시 옥수수에서 정제한 포도당으로 발효시킨 알코올이기 때문이다.
- 마이클 폴란, <잡식동물의 딜레마>, 다른세상, p 34~35
옥수수하면 고과당 옥수수 시럽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지만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기에 패스. 옥수수는 음식으로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다. 완충재, 코팅제, 식물성 왁스 등으로도 사용되지만 연료로도 이용된다. 바이오 에탄올이 바로 그것이다. 앞서 버릴 게 없는 없는 작물이 옥수수라고 했는데 옥수수만큼 다양하게 산업에 이용되는 작물도 드물 것이다. 옥수수가 세계 3대 작물이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옥수수는 이미 현대인의 주식 이상의 역할을 한다.
옥수수 최대 생산국은 미국이다(2위는 중국, 3위는 브라질이다). 미국이 어떻게 옥수수 생산량을 늘렸는지는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2019년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다. 미국(트럼프)과 중국(시진핑)이 박 터지게 싸우면서 중국이 미국산 옥수수를 사지 않겠다고 하자, 안 그래도 남아도는 옥수수를 처리하지 못해 안달이 난 트럼프는(트럼프의 주요 지지자는 중서부 농업지대의 농부들이다) 일본에 옥수수를 떠넘겼다. 트럼프는 일본이 옥수수를 산다며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지만 정작 아베 총리는 수입하겠다고 합의한 적이 없다며 발을 뺀다(주석 1). 이후 이 사건은 어찌 되었나 모르겠다. 일본과 미국 둘 다 수장이 바뀌면서 자연스레 잊힌 것으로 보인다.
누가 봐도 옥수수는 현대사회의 제왕이다. 영화제작자 이주익은 칼럼에서(주석 2) 비주얼, 사운드적 효과를 내기에도 좋고, 미국인에게도 친숙한 작물이어서 옥수수가 선정되지 않았나 추정한다.
텃밭에서 옥수수는 조금 애매한 작물이다. 키가 커서 햇빛을 가리기에 가장자리에 심어야 하고, 한 대에 1~2만 남기고 나머지는 제거해야 하기에 막상 먹을 것도 많지 않다. 옥수수는 씨앗을 심어 키울 수도 있고, 모종 가게에서 모종을 사다가 심어도 된다. 옥수수는 봄에 심어서 여름에 수확하고, 여름에 심어서 가을에 수확한다. 일 년에 2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게 장점이랄까. 따뜻한 중남미가 원산지이기에 옥수수도 차가운 환경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저기온이 10도 이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고온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꽃가루가 날리는 시기에 35도 넘으면 꽃가루가 죽어서 수정이 안된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시기가 딱이다.
작물은 인간이 이용하기 위해서 일부러 키우는, 선택된 식물이다. 과학자들은 지구 최초의 육상 식물로 선태류(이끼류)로 추정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양치식물이 등장하고, 뒤이어 겉씨식물, 속씨식물이 나타났다. 여러 번의 대멸종에도 식물은 꿋꿋이 살아남았고, 인류가 등장하자 그중 일부는 인간과 공생관계를 맺게 되었다. 인류가 길들인 최초의 작물은 무엇일까. (현재까지 밝혀진)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권에서는 밀을 재배 했다. 물론 밀만 재배하지는 않았을 테고 다양한 식물을 작물화하는 실험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 최후의 작물은 무엇이 될까? 이 질문에 답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왜냐면 인류가 언제 멸망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태양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인류가 지구에 살고 있을 수도 있고, 그전에 인류가 멸종하거나 지구를 떠날 수도 있다. 어떻게 되든 살아있는 인류는 작물과 함께 해야 한다. 식물이 없는 지구라고 하니 픽사에서 제작한 영화 '월-E'가 생각난다. 최소의 대사로 사랑의 숭고함을 보여주는(정작 그 사랑은 로봇끼리 한다는 게 아이러니) 감동적인 영화지만, 이 영화의 배경은 쓰레기만 잔뜩 널려서 생명은 아무것도 없는 황폐해진 지구이다.
인류 최후의 작물은 누구도 모르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리라. 먼 훗날 돌이켜 보면, 최초와 최후 사이 어드멘가 옥수수가 인간을 재배했었다는 사실을.
나는 옥수수를 심어본 적이 없다. 올해 처음 옥수수를 시도할 계획이다. 디데이는 5월 12일. 모종을 심을 계획이다. 몇 년 전에 서울식물원에서 받은 옥수수 씨앗도 있는데 어디 있는지 몰겠다. 그건 찾아서 여름에 심어볼까 한다. 봄에 심은 옥수수를 수확하고 나서는 아마도 옥수수로 만든 사료를 먹으며 자란 소의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와 옥수수를 발효시킨 맥주, 콘버터 치즈구이 그리고 삶은 옥수수로 만찬을 즐겨봐야겠다. 미세먼지까지 심한 날이라면 2067년의 기분이 나지 않을까. 유쾌한 기분은 아니겠지만 입은 즐거울 것 같다. 혈관은 싫어하겠지만.
주석 1
1.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article/23627010
2.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디쉬인사이드 https://www.kyobostory.co.kr/contents.do?seq=966&fetv&dishinside=9
참고자료
1. 농사로 http://nongsaro.go.kr/
농업기술길잡이35_옥수수
2. <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다른세상 - 나온지 오래된 책이지만 읽어볼만하다. 강력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