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먹고 맴맴
텃밭농사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작물은 무엇일까? 상추, 케일, 치커리, 겨자채 등의 쌈채소는 당연히 들어가고, 부추, 대파, 토마토(혹은 방울토마토), 가지, 오이, 호박도 인기가 많다. 또 하나 절대 빠뜨리지 않아야 할 작물로 고추가 있다. 고추는 의외로 키우기가 쉽지 않은 작물이지만 초보는 초보대로 찾고, 베테랑은 베테랑 대로 찾는 울트라캡숑짱 인기 절정 작물이기도 하다. 한국인에게 고추는 어떤 역경에도 포기할 수 없는 작물이다.
오랜만에 영화 <마파도>를 보았다. 한국영화를 안(못) 본지 좀 오래되어서 그런지 영화 속 익숙한 얼굴들이 참 반가웠다(회장댁으로 출연한 여운계 배우님은 2009년에 별세하셨다). 무려 2005년도 영화이다(2탄은 2007년도). 15년도 지난 영화인데 다시 봐도 재미있었다. 영화에서 스토리상 가장 중요한 식물(작물)은 대마초이지만 나는 고추가 눈에 들어왔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고립되다시피 사는 5명의 할머니들이 키우는 작물은 과연 무엇일까 하고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자니 엑스트라처럼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고추가 눈에 들어왔다. 수확한 빨간 고추는 햇빛에 잘 마르고 있고, 파란 고추는 할머니의 손길을 기다리며 땡볕 아래 버티고 있었다. 여수댁(김을동)이 제주댁(길해연)을 타박할 때 고추 바구니를 던지고, 나충수(이문식)가 밭일에서 빠져나가려고 자해를 하는 곳은 고추밭이다. 다들 모여서 맛나게 점심을 먹을 때도, 미운 상대에게 대충 차려준 밥상에도 상추와 고추가 늘 올려져 있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어느 작물이 고추를 대신할 수 있을까.
고추는 한국인의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작물이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작물이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17세기 초에 일본에 통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일본이 아닌 다른 지역을 통해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고춧가루 듬뿍 든 김치나 고추장 등은 모두 17세기 이후에나 만들어진 셈이다. 고추라는 새로운 작물은 매운맛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든든한 추종자로 만들었다.
고추는 열매만 먹는 것이 아니다. 잎은 무쳐서 나물로 먹고, 열매는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이용하기도 하고, 풋열매는 그대로 먹기도 하고, 삭혀서 먹기도 하고, 다른 재료와 졸여서 먹기도 하고, 속을 채워 전으로 부쳐 먹기도 한다. 먹성 좋은 한국인들은 고추를 그냥 먹기에는 아쉬웠나 보다.
고추는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재배되는 작물이기에 종류도 무지막지하게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가늘고 긴 모양의 고추를 재배하지만, 모양도 색깔도 맛도 천차만별이다. 피망(파프리카)도 고추의 한 종류이다. 페페론치노, 할라피뇨, 프릭끼누 등 다양한 외국산 고추를 이제는 쉽게 구할 수 있다. 근래 들어 한국음식이 계속 매워지고 있다고 한다. 매운맛 부심은 족보 없는 온갖 매운 음식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매운맛을 내는 1등 공신은 역시나 고추(캅사이신)다.
앞서 고추는 재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모종을 사서 심고, 장마 전에 풋고추만 딸 계획이라면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렇다면 뭐가 어려운가. 모종 키우는 과정과 장마 이후가 어렵다.
먼저 모종을 키우는 게 어렵다. 발아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생육기간이 길어서 최소 2개월은 묘를 길러야 한다. 겨울이나 늦봄에 파종하고 묘(모종)를 기르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당연히 실내나 하우스에서 묘를 길러야 한다.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고추는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기에 온도 관리가 중요하다. 모종을 심을 때도 노지(야외)에 심을 경우 중부지방은 입하(5월 5일)를 지나 심어야 안전하다. 모종 가게에서는 4월부터 고추 모종을 내놓지만 입하 이전에 심었다가 늦서리나 꽃샘추위 같은 저온에 노출되면 냉해를 입을 수 있다.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꾹 참고 5월에 들어서서 심는 것이 좋다(4월에 심는다고 무조건 냉해를 입는다는 말은 아니다).
고추는 병충해에 약하다. 가장 대표적인 병이 탄저병. 탄저병에 걸리면 고추 열매에 화상을 입은 듯한 모양이 생긴다. 장마가 긴 우리나라에서는 장마 이후에 병이 극심해지는데 이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이 고추고, 이런 이유 때문에 농약도 정말 많이 친다. 내가 심은 고추에 탄저병이 없더라도 주변에 병 걸린 개체가 있다면 금세 전염된다. 병 걸린 개체는 무조건 뽑아서 멀리멀리 버리거나 소각해야 한다. 텃밭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많이 심지 않기 때문에 탄저병 걸린 개체도 그냥 두고서 그중에서 병 안 걸린 고추만 수확하기도 한다.
고추는 줄기가 튼튼하지 않아 바람에 약하기 때문에 지지대에 잘 묶어줘야 한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유독 고추만 지지대에 묶여있어도 축 늘어져있는 걸 볼 수 있다. 같은 가지과인 방울토마토, 가지를 비교해보면 고추가 얼마나 약한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일단 줄기 굵기부터 다르다.
모종을 사서 심으려고 보면 꽃이 피어있는 경우가 많다. 처음 핀 꽃은 대부분 떼어주는 편이다. 곁순과 방아다리도 잘 잘라줘야 실한 고추를 얻을 수 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여러 번 수확이 가능한데 풋고추는 초보 농부라도 제법 많이 딸 수 있지만 건고추 만들기는 좀 어렵다. 적당히 큰 고추를 제때 수확하려면 텃밭에 자주 나와야 하고, 여름~가을에 큰 규모의 태풍이 오면 고추 수확도 건조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2020년처럼 장마기간 내내 비가 내리면 고추 농사는 망했다고 봐야 한다. 초보자는 어떻게도 손 쓸 도리가 없다. 작년에 나는 장마가 잠깐 소강상태를 보일 때 텃밭에 갔다가 초토화된, 거의 논처럼 변해버린 밭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하필 그 땅은 예전에 논이어서 평소에도 물이 잘 안 빠졌다). 가지와 방울토마토는 그 와중에도 몇 개는 살아남아있었지만 고추는 예외 없이 전멸이었다. 장마 전에 풋고추 몇 번 딴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매년 고춧가루 값이 오르니 마니 하는 것도 고추농사가 어렵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배추도 진딧물과 해충의 피해가 심하기 때문에 농약을 많이 뿌린다. 배추, 고추 농사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김치는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재료도 그런데 만들 때도 손이 많이 간다).
그럼에도 불굴의 한국인들은 고추를 키우고, 고추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매운걸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 오이 고추 같이 안 맵고 맛있는 품종도 있다.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요리를 할 때 고추를 빼고 만들어서 덜어놓고, 어른을 위해 마지막에 청양고추를 넣어 조리를 하기도 한다. 우리 집도 그렇게 한다. 나는 매운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칼칼한 걸 좋아하는 경상도 여자라 매운맛 10% 정도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흔히 매운 것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바삐 지내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갑자기 매운 라면이 먹고 싶어 졌다. 한국인이 고추를 좋아하는 이유도, 갈수록 음식이 매워지는 것도 살기 팍팍해서 일까. 마파도의 다섯 할머니들은 어쩌다 힘들 때면 대마초에서 위안을 삼았다. 그렇다고 힘들 때마다 대마초를 필수는 없다. 매일매일 크고 작은 삶의 고단함 옆에 고추가 있었다. 고추밭에 나가 잡초 매고, 곁순 제거하고, 고추 따고, 말리고 등등 그 숱한 노동을 할 동안에 시름은 저 멀리 멀어진다. 잡념 없이 일에만 열중하는 동안에는 마음이 평화롭다. 고추밭에서 풀지 못한 화는 매 끼니 고추를 먹으며 삭히지 않았을까. 저마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마파도 할머니들을 고추가 지켜왔다고 하면 과장일까.
올해 고추를 안 심으려다가 오이 고추와 청양고추를 2개씩 심었다. 겨우 4개다. 가을까지 둘지 아니면 여름에 뽑고 배추나 무를 심을지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다. 3일에 걸쳐 계속 비가 내려서 고추 모종이 어찌 되었나 궁금하다. 또 고추 보러 가야지. 내 발걸음 소리를 듣고 쑥쑥 자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