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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Feb 15. 2022

7살의 한글, 41살의 한자

까먹은 만큼 또 배우면 되지


한자 공부를 시작했다. 3년 전에. 


불교 공부를 하다 보니 한자를 몰라 막히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네이버 한자사전에 접속해서 필기인식기에 한 획씩 긋고 있다 보면 화병 돋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마우스로 그리고 있을쏘냐. 훗날 불교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고(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불교 관련 책도 출판하고 싶은 욕망의 여인은 한시라도 빨리 한자를 정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자를 거의 모르는 내 상태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인식하여 한자능력검정시험 6급 책을 샀다. 첫 장에 2020년 12월 29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걸 보니 그때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나 보다. 


시작은 창대하고 끝은 미약했다. 공부하다 말고 하다 말고를 반복하다 보니(공부를 안 했던 시기가 훨씬 길었다) 2020년은 2022년이 되었고, 여전히 나는 한자를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6급에서 벗어나기가 이리 어렵다니! 그러니 어쩌랴. 또 해야지. 다시 첫 페이지를 폈다. 집 가 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한자라는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비실용적인 문자를 만든 이를 저주하면서. 


하루에 한 시간씩 한자공부를 하고 있다. 웬만하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은 하려고 한다. 공휴일은 제외다. 그래서 설 연휴 동안에는 공부를 안 했다. 공부 못하는 사람들 특징이다. 쉬는 건 잘 챙긴다.  





딸아이가 6살 때부터 한글을 가르쳤다. 학습지를 신청할까 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쓸데없는 교구가 포함되고, 비용도 예상보다 높아서 집에서 가르치기로 했다. 단행본으로 나온 교재를 몇 권 샀다. 


딸아이는 한글을 어려워했다. 가르치는 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글 조합 원리를 이야기해주었지만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받침 없는 쉬운 단어를 통 글자로 익히는 방식으로 가르쳤다. 열 번이 넘게 쓴 것도 금방 까먹는 바람에 나는 화내고 애는 우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한글이 어려운 건지, 내가 못 가르치는 건지, 애가 공부머리가 없는 건지 고민에 빠진 적도 많았다. 결국 항복을 선언한 건 나. 학교 들어가기 전에만 익히면 된다 싶어서 공부를 포기했더니 집에 평화와 여유가 찾아왔다. 


해가 바뀌어 7살이 된 아이는 같이 발레학원에 다니는 친구가 글자를 다 알고, 어린이집 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싶다며 자기도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공부를 시작했다. 나 역시 이번에는 욕심과 화를 내려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시 한글 조합 원리를 알려주었다. 6살 때보다는 조금 더 이해하는 듯했지만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패스. 교재에 있는 대로 ㄱ부터 차례로 단어를 익혀나가면서 조합 원리를 알 수 있게 다른 글자들과 비교해주었다. 모르는 글자가 많으면 진도를 천천히 나갔다. 요즘 떠듬떠듬 간판 글자도 읽으려 하고 동화책도 읽으려고 하는 등 의욕이 있어 그런지 작년보다 공부 태도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배운 만큼 까먹었다. 


예를 들어 금방 서커스를 3번 쓰고 읽었는데도 커 를 쓰라고 하면 못쓴다. 어제 배운 것은 모르는게 태반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얼굴은 굳고 목소리가 올라가고 말투에 화가 묻어나는 일이 자주 생겼다. '왜 방금 했는데 몰라!' 하며 다그친 적도 많았다. 아이는 공부하다 말고 목이 마르다 오줌이 마렵다 하면서 자꾸 책상에서 일어나니 그것도 내 화를 돋우었다. 틀리게 썼다고 지적하면 너무나 당당하게 '실수할 수도 있지' 하며 대꾸하기도 했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훨씬 덜 화를 내고 있으니 조금이나마 나아진 걸까. 아예 화를 안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화를 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화내지 말자 되뇌고 있다. 중생과 보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셈이다. 



오늘 한자 공부를 하면서 7살 아이와 나는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가 10초 전에 배운걸 까먹는다면 나는 하루 전에 공부한 걸 까먹는다는 차이만 있을 뿐, 잊어버린다는 점에서는 결국 같았다. 흔히 쓰는 한자인데도 기억이 나지 않고, 어제 공부한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이 탓인지 노력 탓인지 모르겠다. 내게도 한자 선생님이 있었다면 '왜 방금했는데 몰라'하면서 화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마 딸아이보다 더 서럽게 울었겠지. 아이와 나는 또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울보다. 까먹는 양 보다 기억하는 양이 많으려면 꾸준히 공부해서 양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언어 공부의 왕도는 없다 하지 않는가. 



결국 7살 아이와 41살 나는 까먹기 동지였다. 게다가 선택적 망각자. 아이는 글자는 그렇게 잘 까먹어도 뭐 사준다거나 어디 간다는 약속 만큼은 절대 잊지 않았다. 나 역시 장에 가서 사야할 물건이나 한자는 잘 까먹어도 납부해야하거나 받아야할 돈은 잘 기억하지 않는가. 이 환장의 콤비는 한글과 한자를 정복하기 위해 오늘도 배우고 잊는다.


일 년 동안 나는 한자능력검정시험 4급까지 마스터하기, 아이는 한글 떼기가 목표. 


엄마와 딸은 까먹기 동지, 공부 동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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