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영 Apr 04. 2023

영화와 불교 1_ <당갈(2016)>

운명은 누구의 것일까?



 다시 돌아온 1월, 반갑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다. 저 멀리 시베리아 고기압을 타고 온 동장군은 싱숭생숭한 중생의 마음 따윈 아랑곳 않고 기세를 떨치는데 외려 훈풍이 부는 곳이 있다. 올해는 이놈의 팔자가 고쳐질는지 어떤지, 대박일지 쪽박일지 그것도 아니면 중박이라도 될지 알고 싶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드는 사람들 덕분에 1월의 점집에는 훈풍을 넘어 열풍이 분다. 용하다 소문난 그네들은 내 인생의 흥망성쇠를 예언할 수 있을까.  


 과학이 발달했다고 하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도 이럴진대 옛사람들이라고 운명이 궁금하지 않았을 리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셨던 당시의 인도에서는 운명에 관한 세 가지 설이 널리 퍼져있었다. 첫째는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설이고, 두 번째는 운명은 신의 뜻에 달려있다는 설이고, 세 번째는 운명 따윈 없으니 이번 생에 하고 싶은 건 맘껏 하고 가야 한다는 설이었다. 부처님께서는 모두 다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세 가지 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운명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설에 의하면 운명이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세 번째 설에 의하면 운명이란 내가 어찌하든 말든 나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운명에 갇혔거나, 운명에서 배제되었는데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무슨 상관이랴. 


 부처님께서는 혼란을 겪는 대중에게 새로운 법을 말씀하셨다. 바로 연기법緣起法이다. 연기법은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사물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기 때문에 무한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운명 역시 그러하다. 내 행동의 결과는 업이 되고 결국 내게 돌아온다. 이번 생에 받지 않은 과보는 다음 생에 아니면 그다음 생에서라도 반드시 받게 된다. 부처님의 법에 의해 비로소 인간은 운명의 주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운명은 오롯이 나만의 것일까. 내가 잘나서, 내가 노력해서, 내 힘으로 성공했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의 조건에 의해 삶이 흔들리는 경우도 많다. 영화 <당갈>의 주인공들도 그러하다. 


사진 1.


 <당갈>은 2016년에 개봉한 인도영화다. 인도영화는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비주류 영화이지만 필자가 영화를 공부하던 2000년대 초에 비하면 다양한 작품이 알려졌고, 유튜브, 넷플릭스 등의 영향으로 접하기도 쉬워졌다. 인도영화는 상영시간이 3시간에 이를 정도로 길고(그래서 인터미션이라는 중간 휴식시간이 있다),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장면이 뜬금없이 등장하며(그것도 자주), 편집이 과하게 화려하거나 늘어지고(좀 과장하자면 총을 맞아도 쓰러지는데 최소 십 분이 걸린다), 등장인물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울고 웃기를 잘해 처음 보는 사람은 당혹스럽고 부담스럽기 일쑤다. 필자는 영화를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영화를 추천해 달라는 말을 종종 듣는데 불행히도 필자가 추천한 영화가 재미있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당갈>은 예외였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다고 했다. 그래도 안 믿을 것 같아 객관적인 자료를 언급하자면 2016년에 개봉한 <당갈>은 2023년 1월 현재 인도에서 역대 흥행 1위에 여전히 랭크되어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흥행하여 3억 달러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다.


 <당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줄거리는 이렇다. 실력 있는 레슬링 선수 ‘마하비르 싱 포갓’은 레슬링으로는 먹고살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레슬링 대신 취직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 바로 조국을 위한 금메달은 장차 태어날 아들이 이뤄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간절한 바람과 달리 딸 넷이 줄줄이 태어나자 그는 결국 꿈을 포기한다. 희망도 의욕도 없이 살아가던 어느 날 집에 들어온 포갓은 잔뜩 성이 난 학부모를 맞닥뜨린다. 장녀 ‘기타’와 차녀 ‘비비타’가 자기들을 놀린 남자아이를 두들겨 패 상처투성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흙먼지 하나 안 묻고 멀쩡한 딸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포갓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딸내미의 피에 흐르는 파이터의 기운을 감지한 그는 이튿날부터 강제 레슬링 훈련에 돌입한다.



사진 2.




 앞서 연기법을 이야기했는데 연기법을 인연법因緣法 또는 인과법因果法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라는 닳고 닳은 관용어처럼 인연을 사람들 간의 만남과 헤어짐에 국한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연의 뜻은 훨씬 더 넓고 깊다. 인因은 원인이고, 연緣은 조건이나 상황이다. 농사를 예로 들자면 씨앗은 인이고, 땅의 상태, 날씨, 비, 병충해, 비료, 농부의 노력 등이 연이다. 인과 연이 만나 결과, 즉 과果를 맺는다. 


 비록 마음먹은 대로 제어가 잘 안 되기는 하지만 내 생각과 의지와 몸뚱이는 내 것이라 어찌어찌하면 되겠다는 일말의 여지라도 있지만 나를 둘러싼 조건과 상황, 그러니까 연은 내 힘으로 바꾸기가 어렵다.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레슬링 훈령을 받게 된 기타와 비비타 역시 그러했다. 포갓의 온 가족은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과 멸시를 받게 되는데 특히나 당사자인 기타와 비비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업신여김의 이유는 단 하나, ‘여자’가 레슬링을 한다는 것이다. 가족이라고 갈등이 없는 건 아니다. 포갓이 단백질이 부족한 딸아이를 위해 직접 닭요리를 하겠다고 하자 아내는 기함을 한다. 딸아이에게 레슬링 훈련시키는 건 한마디도 안 했지만 부엌에서 요리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남편을 향해 일갈한다. 아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바구니 들고 당당히 닭집으로 간 포갓은 자신감 넘치는 말발로 주인을 구워삶아 싸게 닭을 사는 데 성공한다. 그는 요리책을 봐가며 닭을 조리해 아이에게 먹인다. 


 어느 날 훈련을 빼먹고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신나게 놀던 기타와 비비타. 식장에 난입한 아버지는 이를 방관한 조카에게 손찌검을 하고 흥겹던 결혼식장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가라앉는다. 그간의 설움이 치솟은 기타와 비비타는 결혼식을 올린 친구 앞에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는데 곱디고운 신부복을 입은 친구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한다. 

 "나도 그런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어... 대부분의 여자들은 14살만 되면 생전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시집가 평생을 가사노동과 육아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런데 너희 아버지는 비웃음을 당하며 온 세상과 싸우면서도 너희가 미래와 삶을 가질 수 있게 해주잖아."

 그 말에 충격은 받은 기타와 비비타는 그렇게 싫어했던 레슬링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된다. 기타와 비비타에게 레슬링은 연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날 이후 비로소 인이 되었고, 인과 연이 만나 결국 금메달이라는 과를 얻게 된다.  


사진2. 상단 좌측부터 기타, 비비타, 마하비르 싱 포갓 / 하단: 배우들과 실제인물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연인 경우가 많았다. 남자라서, 여자라서, 신분이 낮아서, 신분이 높아서, 돈이 적어서, 돈이 많아서, 피부색이 달라서 등등 태어났을 때 이미 정해져 있던 연들 이 그물처럼 촘촘히 둘러싸 인을 옭아매었다. 부처님께서는 고정된 연을 부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셨다. 신분이 낮은 이들을 교단에 받아들였고 승단에서는 오직 법랍에 따라 순서가 정해졌다. 석가족의 왕족들이 먼저 출가한 이발사 출신 우바리에게 절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을 때 부처님은 원칙을 고수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콧대 높은 왕족들은 자만심을 버리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성직자로 인정받고(비구니는 비구보다 더 많은 계를 지켜야 하지만) 활동하게 된 것도 불교가 최초이다. 현대에도 개신교의 일부 파는 여성을 목사로 임명(안수) 하지 않으며, 가톨릭의 성직자는 남자만 가능하기 때문에 수녀는 신부 없이 미사를 집전할 수 없다. 2500년 전 부처님께서 보이신 평등사상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아도 여전히 선구적이고 충격적이다. 

 


 부처님께서는 사회적, 문화적 조건만 강조하지 않으셨다.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영국에서 독립한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이었던 암베드카르가 일으킨 신불교 운동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불교를 사회 개혁을 위한 개념과 수단으로만 이용했기 때문이다. 주변 조건이 완전하다 하더라도 내가 발심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으면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에 다가설 수 없다.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은 인에만, 운이나 가피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연에만 방점을 둔 기울어진 결론으로 인연과 운명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우리는 인과 연 사이에서 운명을 만들어간다. 그러니 운명은 나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1월은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시작이 설레는 이도, 쌓여만 가는 세월이 허무한 이도 1월에는 힘을 내어 몸과 마음을 쫙쫙 펴보자. 우리는 운명과 함께 당갈에 섰다(당갈은 힌디어로 레슬링 경기장을 뜻한다). 


 ‘운명이 너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주어도 준비할 날들이 많지 않아. 운명은 너에게 무수한 땀방울을 요구하지만 넌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걸 기억해. 운명은 너의 노력에 고개 숙일 것이니 당갈 당갈~’(주제가 ‘Dangal'의 일부 가사)    




(2023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월간 봉은판전> 게재) 





사진출처:

1. <당갈> 포스터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2332533

2. <당갈> 의 한 장면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2332533

2. Sports W

https://m.sportsw.kr/news/articleView.html?idxno=9085


매거진의 이전글 2020년, 코로나19, 판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