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는 공간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상상력
사흘간의 전쟁 같은 연말연시 카페일이 끝나고 오늘부터 삼 일간은 쉬는 날이다. 오랜만에 호숫가를 두 바퀴 뛰고, 요가와 홈트레이닝까지 마쳤다. 개운한 마음으로 여느 때처럼 시리즈물을 보면서 글을 써볼까 하고 거실로 나왔는데 하우스메이트로 들어온 지 한 달 정도 된 티노가 이미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티노는 짐바브웨 출신이고 15살에 영국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처음에 방을 보러 왔을 때는 영국출신이라고 했지만, 막상 들어와서 주로 먹는 식단과 말투 등이 그냥 몸만 영국으로 가고 자신의 문화로 가득한 동네에서 섬에 살듯이 산 듯한 느낌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English Breakfast*가 뭔지 몰랐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이런 식으로 맞지 않는 것들이 꽤 있었지만, 간호사로 정식 등록된 것을 확인하고, 그래도 나름 집안을 깔끔하게 유지하면서 조용히 지내는 모습을 보고 그러려니 하고 지낸다.
내가 생각하기엔 다소 협소한 방으로 이사 들어와 주로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던 터라, 티노가 거실에 나와있으면 자리를 양보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요 며칠간 내가 이런저런 생활에티켓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아 조금 서먹해져 있었던 터라, 말을 터서 서로 편해질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토스트와 음료를 들고 와 앉아서 티브이를 잠깐 같이 보며 시시콜콜 떠들며 나름의 죄책감을 덜고 방에 들어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문을 꼭 닫아놓고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 거실에서 방들과 화장실로 통하는 작은 복도로 티노가 드나드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얇은 줄기의 폭포소리가 들렸다.
*홍차 블렌드 중 가장 흔하다. 그다음으로 흔한 것은 Earl Grey.
생활공간과 정돈에 민감했던 나는 호주에 와서도 형편이 되자마자 작은 플랫부터 렌트했다. 처음 한 두 해 정도는 친오빠와 생활을 했는데, 한국 문화권에서 성장한 내가 성인이 되어서 가족과 지낸다는 것이 내 삶의 범위를 상당히 제한시킬 수 있다는 것, 적어도 내가 그렇게 느끼는 바가 크다는 것을 그때 깨닫고 이런저런 핑계로 친오빠를 쫓아내다시피 했었다. 무엇보다 제일 거슬렸지만 차마 상의하지 못했던 것이 있는데, 친오빠가 화장실을 문도 닫는 둥 마는 둥 해놓고 서서 용변을 볼 때였다. 바로 옆에서 볼일을 보는 것처럼 소리가 크고 분명했는데, 여러 번의 듣는 경험을 통한 패턴분석에 의해, 의식적으로 경사면이 아닌 물이 고여있는 중앙으로 조준해서 소리를 극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용변을 보는 소리를 듣는다거나, 자신의 소리가 누구에게 들리게 하는 것을 당연히 안 좋아하는 줄 알았다. 내가 그러니까 다들 그런 줄 알고 지내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 하나였다. 나는 화장실을 갈 때마다 바로 옆 방에 누가 있는 것 같으면 정말 의식이 되는데, 내가 혼자 살 각오를 한다면 가장 큰 이유는 이 '물소리'다.
나는 친오빠와 가깝고, 친오빠와 지내기로 한 것도 마냥 좋을 줄 알았던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소리가 점점 귀를 후벼 파기 시작한 이후로, 남성이 여성과 같이 지내면서, 혹은 여성의 집에 초대받아 놀러 가서, 화장실에서 이렇게 의식적인지 습관적인지 모를 폭포수 소리를 만들어낼 때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같이 있는 공간에서 변기를 서서 사용하는 것은 물론 문도 다 닫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남성성을 자랑하고 싶은 본능이거나 아니면 주변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선자는 미개하고 후자는 자기중심적이라고 깔끔하게 주장하련다.
오랜 세월 같이 살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친오빠와도 더 이상 살지 않기로 한 뒤 모르는 사람들을 들이기 시작했을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성 남성 딱히 가리지 않고 같이 살 집의 방을 내주었다. 대신에 입주할 사람을 신중히 고르고 직접 집을 둘러보게 하고 말을 터보면서 골랐다. 여러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배운 점이 있다면, 각기 장단점이 있고 같은 성별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신분은 누구라도 꼼꼼히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처음에는 여성만을 고집해 입주시켰는데, 어느 날 누군가가 같이 쓰게 해 준 밥솥에서 밥을 덜고 뚜껑을 닫지도 않은 채 출근한 것을 보고 바로 내보내버렸다. 집에 불을 낼, 안전에 직결될 수 있는 이런 습관이 있는 사람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급하게 다른 입주자를 구했다.
그다음 입주자는 이탈리아에서 물리학 박사과정에 있고, 근처 대학교에 1-2년 정도 연구원으로 발령 난 로렌조였다. 로렌조와 그렇게 2년 정도 같이 지내면서 몇 안 되는 가까운 친구로 발전했다.
친오빠가 같이 지내면서 사용했던 정확히 같은 변기를 이용하면서도 난 한 번도 그의 물줄기 소리를 듣지 못했다. 화장실을 중간에 끼고 한쪽이 내 방, 다른 한쪽이 세를 내준, 이 전에는 오빠가 살던 방이었고, 변기는 내 방 벽 쪽에 있었다. 앉아서 용변을 보면 소리가 이렇게까지 안 날 수가 있다니, 물론 아얘 안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소음은 폭포소리에 비해 일정 데시벨 이하여서 아주 조용한 가운데 들려도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조심한다는 것을 무심결에 아는 것도 일부 작용한 듯했다. 사실 나는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냥 작던 크던 그런 의식되는 소리가 들리면 거슬려하는 것인가, 사람이라면 다 용변을 봐야 하고 나도 그중 하나인데 이렇게 예민하면 어찌하나 우려를 했었는데 로렌조를 통해 크게 안심했다. 그렇게 2년 동안은 친오빠와 로렌조 중 누가 화장실을 쓰고 있는지 눈감고도 맞출 수 있었다.
외곽지역으로 이사를 나오고, 병원 근처로 집을 산 후 첫 입주자로 들어온 티노. 나는 간절히 티노도 로렌조와 같은 매너남이길 바라며, 영국에서 외지생활을 오래 했다면 다른 사람들과 살았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의 에티켓을 알지 않을까, 하고 넘겨짚어 입주를 결정했었다. 얼마 전까지는 의식할 정도로 소리가 들리지 않았었는데, 화장실이 바로 내 방 옆도 아니고 복도 건너편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금 그 조준된 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나는 가족을 제외하고 모든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용공간 사용이나 서로 피해를 줄 수 있는 경우, 또는 내가 피해를 보는 경우에 대해 혼자 오랫동안 삭히지 않는다. 일단 입주해 있고 큰 사고가 없어 이렇다 할 이유가 없지만 솔직히 맘에 들지 않을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얼마 후 물을 한잔 마시러 거실로 나와 티노에게 당부했다.
Will you make sure to shut the door and sit when you are using the loo? I can hear you streaming from my room. I think it is a common etiquette when you are around females.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깐깐하게 군다고 생각하고 그게 싫다면 나가주겠지.
얼마 전, 호주에 와 있는 내내 참아주기만 하던 오빠의 화장실 예절에 대해 드디어 한 마디 했다. 드디어 장만한,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장벽과도 같은 부동산, 내 집에 놀러 와 용변을 보면서 변기 의자도 도로 내려놓지 않는 것이 참 무심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러다 진짜 여자친구도 못 사귀겠다 싶어 차마 폭포수까지는 말을 못 하고 여자 집에 와서 화장실을 쓰고 나면 변기 의자를 내려놔 달라고 부탁했다. 나 같은 경우는 남자가 사는 집에 가서 화장실을 쓰면, 원래 의자가 올려져 있었으면 다시 올려놓고, 경우에 따라서는 뚜껑까지 다 내려놔서 내가 어느 정도 신경을 써서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일종의 표시를 해둔다.
친오빠는 한두 번 지키는 가 싶더니, 다시 도루묵이 되었다.

*Cover photo by mikoto.raw Photograp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