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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성이 아빠 Dec 23. 2020

갈지자로 걸어도 나아가기만 하면 돼

휴직 237일째, 민성이 D+486

'할머니, 이건 뭐예요? 저도 이거 먹고 싶어요.' / 2020.12.22. 부모님 집


어제(22일)는 민성이가 유독 낮잠을 자지 못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 1시가 넘었는데도 통 자려하질 않았다. 오전에 졸려하는 것 같아 아주 잠깐, 10분이나 됐을까, 아이 침실에 눕힌 게 화근이 됐나 보다.


아이가 자야 나도 좀 쉰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1시간에서 운 좋으면 2시간, 나는 그때 씻고, 먹고, (아주 조금) 놀 수 있다. 하루 딱 한 번 아이가 낮잠을 잘 때, 나도 하루 딱 한 번 쉴 수 있다.


아이가 자지 않으면, 그럴 수 없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아이가 낮잠을 잘 잘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아이가 기계도 아닌데. 하지만 그건 지나고 생각하니 그런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자지 않는 아들이 야속했다. 배도 고픈데 잠이라도 보충해야지. 놀고 있는 아이 옆에 누웠다. 순식간에 코를 골며 반수면 상태에 빠졌는데 무언가 뾰족한 것이 볼을 찌른다. 책 모서리다.


아내가 출근한 뒤, 아침에만 책을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쉬지 않는다. 결국 자리에 앉아 일독을 보탠다. 민성이는 그러고도 몇 분을 더 놀다, 마지못해 1시간 정도 낮잠을 잤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못 간지 한 달이 되어간다. 휴원 일주일을 넘기며 좌절했던 과거의 내가 귀여울 지경이다(어린이집 휴원 2주 차). 난 이제 실망하지 않는다. 등원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고약한 상황이다. 아이는 등원하지 못한다. 집 밖에 나가기도 부담스럽다. 군산엔 친구가 없다. 더욱이 나는 육아휴직 중인 남자다. 육아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나무숲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답하고 외롭다.


그나마 부모님이 근처에 있다는 게 유일한 오아시스랄까. 매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나는 부모님 집으로 피신한다. 그마저도 없었으면,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진작에 말라버렸을 것이다.


어제저녁, 부모님 집에서 돌아와 밀린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막 목욕을 끝낸 민성이가 발가벗은 채 내 다리에 철썩 들러붙는다. 그리고는 깔깔 웃는다. 메마른 마음에 다시 생기가 차오른다. 난 그렇게 매일 울다 웃는다.


갈지자로 걸어도 꾸준히 걷다 보면 이 지독한 상황도 끝이 나겠지. 오늘도 나는 브런치를 쓰고, 민성이 밥을 챙기고, 그에게 책을 읽어줄 준비를 한다. 조금 천천히 걸어도 되니, 포기하지만 말자. 언젠간 도착할 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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