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성이 아빠 Apr 23. 2021

왕이 없는 마을

휴직 358일째, 민성이 D+607

전하. 음식은 입에 맞으신지요? / 2021.4.22. 우리 집


어제(22일) 아내는 휴가를 냈다. 어린이집 학부모 상담을 위해서다. 물론 휴가를 쓰지 않아도 되는 내가 가면 그만이지만, 아내는 한사코 본인이 가겠다고 했다. 


그녀는 벼르고 별렀다. 아내는 지난해 첫 학부모 상담 때도 본인이 가고 싶어 했지만, 밀려드는 회사 일에 눈물을 머금고 상담을 포기했다(부모님 오시라고 해라). 이번엔 몇 주 전부터 팀장에게 단단히 말을 해놓았단다.


평소보다 훠얼씬 여유 있게 아이를 등원시키고, 텅 빈 집엔 - 아이 한 명이 어린이집에 간 것뿐인데, 진짜 그런 느낌이 든다 - 덩그러니 아내와 나 둘만 남았다.


"왕이 없는 마을이네." 평소대로 민성이의 옷가지를 빨래 바구니에 담고 있는데,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던 아내가 말했다. "그러게. 부인도 민성이 없을 땐 왕이었는데 이렇게 됐네?" 난 웃으며 대꾸했다. 


둘만 있을 땐 왕이었던 그녀는 왕을 낳고 나선 신분이 수직 하락했다. 그래도 왕이 없는 이 마을에선 상급 노예인 아내가 왕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낄낄대며 인터넷으로 찾아놓은 카페에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상담 시간은 오후 5시. 브런치를 먹고 나서, 아내는 학부모 상담 전에 미용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물론 상담 때문은 아니다. 요즘 자신의 몰골이 엉망이라면서 전부터 가고 싶어 했다. 


"파마만 4시간이래." 아내가 메시지를 보냈다. 원래는 염색까지 하려고 했는데 택도 없었다. 역시 여자 머리는 남자 머리와 차원이 다르다. 타임 푸어인 아내가 미용실을 못 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한껏 멋들어진 웨이브를 뽐내며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민성이를 데리러 나갔다. 어린이집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아이와 집 앞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멀리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아내가 걸어왔다.


"어디 선 보러 가시나 봐요?" 내가 물었다. 민성이를 낳고 나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옷이다. 그녀는 여전히 예뻤지만, 학부모 상담 10분 전에 느닷없이 그 옷을 꺼내 입은 게 웃겼다. 귀엽기도 하고. 


그녀는 성공적인 첫 학부모 상담을 마치고, 다시 상급 노예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찌감치 왕 옆에서 곯아떨어졌다. 아내와 나는 잠시 왕 없는 시간을 누려서, 민성이는 노예 둘을 동시에 거느려서 즐거운 하루였다. ###

매거진의 이전글 귀여운 까꿍 도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