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某也視善

by 강물처럼


눈이 내렸다.

이 시간 밖은 눈 세상이다. -8도, 컴퓨터가 대체로 흐림이라고 일러준다.

남궁 주임은 아내의 전 직장 동료다. 헤어지고 나서도 관계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 서로 좋아지내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나도 덩달아 알은체를 하고 혹시라도 마주치게 되면 반갑게 인사하며 지낸다.

어제 오후 늦게, 5시가 다 되어 진안으로 출발했다. 다음날은 눈이 더 내릴 것이고 온도가 한참 내려갈 것이라고, 한파 특보며 대설 경보 같은 말들이 휴대폰에 가득했으니까.

눈발이 날리긴 했지만 - '날리면'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정말 그게 '날리면'이 맞나?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 바람이 불고 아직 눈송이가 되지 못한 연한 것들이어서 도로에 쌓이지는 않았다. 남궁 주임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진안에 다녀왔다. 다시 익산에 도착한 것이 8시. 강이를 성당에서 태우고 집에 왔다. 눈이 내리는 것이 보기 좋아서 시내 치킨집에 앉아 치킨 한 마리를 시켰다. 차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세워놓고....

치킨 한 마리를 셋이서 다 못 먹는다고 웃었지만 강이는 차 안에서 주먹밥을 하나 먹었고, 나하고 아내는 장례식장에서 저녁을 먹고 온 길 아니던가. 그러니까 사람은 여기만 보고 웃는다. 여기만 보고 울고. 어쩌면 그래서 사람인 줄도 모른다. 사람이 사는 길은 눈이 내리고 있는 창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창밖을 내다보는 이 안쪽에 있다. 사실 모든 '길'은 저 바깥에 있는데 여기다 집을 짓고 여기를 놓지 못해서 여기를 지킨다. 지킬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놓지 못해서.

여기를 지금이라고 해석하는 방식은 은유적이어서 차츰 밝아지는 새벽을 지키는 인상을 가졌다. 그러나 지금을 여기로 대하는 태도는 하루를 낮과 밤으로 엮는 것처럼 드센 데가 있다. 물론 모든 시간은 현재, 지금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은 '여기'처럼 시공간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말이 되지 못한다. 우리 함께 있다는 말은 우리 '여기' 있다는 말보다 가볍다. 둘 사이가 좋은 지금이야 그것이 전부고 그것밖에 없어서 '여기' 대신에 '함께'라고 자랑하고 싶은 감정이지만, '여기'는 그 감정도 소중히 다뤄서 더 멀리 퍼져나가는 물살의 힘이 있다. 거대한 배도 띄워내는 그 물결이 형상화되는 시간이며 공간이 '여기'다. '함께'는 시간이 흐르면 무뎌지고 무너진다. 대신 '여기'라고 했던 거기는 우리 '여기' 있었다고 할 때조차도 현재형으로 과감하게 등장한다. '여기'에 있는 존재는 그래서 늘 새롭고 힘이 있다. 죽음마저도 여기에 있으면 성장한다.

지금에서 여기가 빠져나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가 누리는 '지금'에는 진정한 의미의 '여기'가 없다. 여기는 창 안쪽으로만 흐르는 공간이어서는 안 된다. 저 바깥에 훨씬, 엄청난 여기가 있는데 우리는 거기를 잊고서 여기만 알뜰살뜰 가꾼다. 그러고서 울타리 너머의 잔디가 더 푸르다고 푸념하느라, 때에 따라서는 우울해지기도 한다.

계속 커지는 것은 계속 작아지기도 할 줄 아는 것이 자연스럽고 흥미로운데 우리는 자꾸 작아지고만 있다. 작아지는 것도 아니고 축소하고 있다. 縮小 - 모양이나 규모 따위를 줄여서 작게 함, 유의어 감축, 삭감. 그것은 인간의 기술이다. 인간의 의지이며 도전이다. 작아지는 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라 인력으로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서로 간의 영역을 교차하는 시대에 살면서 사람은 '그'의 땅에 발을 들여놓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하나의 가능성이 새로 생길 때마다 사람은 환호했다. 그리고 그 환호는 점점 거대해질 것이다. 가능성이 무한대로 솟아오르는 꿈을 쏘아 올리고 얼마쯤 지날까.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에게 '지금'은 있어도 '여기'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서러울 것이다. 그러다가 또 알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지금'일까.

치킨 네 조각이 남았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게 안에도 눈이 내린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데서 와서 여기 머물다 아주 먼 데로 흘러간다. '지금'이 저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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