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지금은 반대 상황이 되었다. 민주주의의 형식적 확대와 자본의 무한한 증식으로 학교는 이제 서비스센터가 되어 버렸다. 초중고의 목적은 오직 대학입시, 또 대학의 목적은 오직 취업이다. 관성은커녕 온통 재성만을 연마하도록 주입한다. 시대적 사명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고, 성공의 척도는 다만 연봉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138p.
1시 46분.
현관 벨이 삐삐, 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깼다.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많이 늦었구나.
산이는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방학이라 아침에 서둘러 깨우지 않아도 된다. 내일 아침은 늦게까지 자도록 내버려 둬야겠다. - 2024. 0123. 01시 50분.
知之爲知之 不之爲不知 是知也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 《논어論語》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 내가 사는 것을 보는 아이에게 나는 책도 권하고 길을 걷자고도 한다. 밥집에도 찾아가고 학교 앞까지 태워주기도 한다. 내가 감동하는 것들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러나 나와 같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내가 믿는 종교를 아이가 믿는다. 내가 마련한 집에서 머문다. 내가 듣는 음악이 아이의 마음속으로 흘러든다. 나는 그래도 괜찮은가 스스로 묻는다. 정말 괜찮은가. '모른다', 사실은 나도 알지 못한다. 아이가 사는 게 뭐냐고 물을까 봐 먼저 자리를 피할 때가 있다. 삶이 무엇인지, 나에게는 그 대답이 없다는 것을 언제쯤 토로해야 할까.
"그러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다들 대단하다고 그러더라고요. 특히 우리 회장님 하고 이사님, 정년퇴직하고 자식들이 다 잘 되어서 사는 분인데, 자기는 자식들 하고 그러지 못했다면서 정말 잘하고 있는 거라고 그래요."
곧 설 연휴가 찾아온다. 아침 밥상에는 저번에 대야 장터에서 사 온 갑오징어가 보기 좋게 차려졌다. 맞은편에 앉은 아내가 일터에서 있었던 소소한 것들을 꺼내놓고 판다. 눈깔사탕이며 뽀빠이 같은 과자를 줄느런히 늘어놓고 팔던 구멍가게 앞을 기웃거리던 아이처럼 맛있어 보이는 반찬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내에게는 밥값과 이야기 값을 따로 쳐줘야겠다. 그러면서 나온 말이다. 걷기 잘했다고 그러면서.
이틀이나 산이 얼굴을 못 봤다며 아이 자는 방에 쪼르르 쫓아간다. 이야기는 이렇게 다른 이야기를 낳는다. 밥그릇을 치우고 냉장고에 반찬들을 들여놓는다. 아내는 이런 구석에서 나와 다르다. 활짝 열어놓은 방 안에서 토닥토닥 엉덩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우리 아들, 이불도 다 안 덮고 자고 있네!"
자식복 있는 사람은 먹는 복도 같이 타고난다고 그런다. 아내는 그것을 알고 있을까. 아내를 보면서 배우는 것이 있다. 타고난 복이 있고 없고는 내 소관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인연들이 부르는 여음이나 후렴 아니겠는가. 아내는 자기가 가진 것을 다룰 줄 안다. 그것이 작은 것이든 소박한 것이든 닦아가면서 살핀다. 가끔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나에게 부족한 것이 저것인 것을 깨닫는다. 나도 1cm쯤 변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한다.
¶ 그래서 역사에는 진보가 있을 수 없다. 역사적 실천이란 어떤 정해진 목표지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배치 속에서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일 뿐이다. 다윈이 말하는 진화의 원칙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진화에는 목표도, 방향도 없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고 거기서 단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바로 진화일 뿐이다. - 고미숙, 같은 책 139p.
눈이 그친 날에 시 한 편 날린다.
그 '날리면'이 자꾸 생각나는 것이 나도 싫다. 어쩌자고 그런 변명을 하고 말았을까...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