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 가되 매 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 탐구가 된다. 중략,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31p.
서쪽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지리산 주능선이 보였다. 하얗게 눈이 쌓인 것이 멀리서도 장엄하다. 설산雪山은 거기가 어디라도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세계 같아서 늘 설렌다.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청룡, 그 용의 등줄기에도 세월이 내리면 꼭 저렇게 희어질 것이다. 길을 걷는 내내 가까이 두고 보았다. 책을 보듯이 산을 보았다. 오늘 첫발을 떼며 설렜던 것이 너 때문이었구나, 그랬었구나. 오르막은 다 온 거 같다며 좋아하는 세 사람은 저 산이 안 보이는 듯했다. 자기들 기분에 빠져 벌써 길을 다 마친 사람들 같았다. 여전히 숙제를 해치우듯 걷는 백성이다. 길이 내리막을 가리키더라도 얼마든지 오르면서 걸을 수 있고 끝없을 것 같은 오르막에서도 내리막처럼 한가로울 수 있는 것이 순전히 내게 달렸다는 것을 그대들은 왜 모르는가. 임도를 벗어나 숲길로 들어섰다. 산이와 엄마가 앞에 가고 강이 뒤에서 내가 따랐다. 조릿대가 무성했다.
"강이야, 다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나고 싶어?"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대답이 나왔다. 그 차이가 제법 커서 잠시 말을 잃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부모라는 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찾아온 존재인 것을 잠시 놓쳤다. 내가 데리고 다니고 내가 키운다고 착각할수록 큰 오류에 빠지기 쉬운 미로다. 어쩌면 아주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계속 깊어지는 그런 길이 자식과 부모 사이에 난 길 아닐까. 다음 생은 없겠지만, 강이는 분명히 단서를 달고 시작한다. 자기는 부잣집 고양이가 좋겠다고 그런다. 나는 조금 실망인데 저는 그 만한 삶이 어디 있겠냐며 아주 바람직하다는 투다. 공부를 안 해도 되고 얼마나 좋겠냐고 되묻는다. 너는 부잣집이 좋은 거냐, 고양이가 좋은 거냐 물었더니 한 방 보기 좋게 먹인다.
"아빠, 그건 밥하고 반찬 같은 거야. 하나만 먹을 수 없는 것처럼 그 두 개는 한 세트야.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그러는 거하고 비슷해."
당돌했고 돌연스럽고 깜찍했으며 놀라웠다. 상대가 원하는 대답 말고 자기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당돌했고, 고양이는 돌연스러웠으며 그 순수한 맛에 깜찍함이 있었고 어린아이에게도 자본은 중요하다는 것이 놀라웠다. 공부를 많이 할 필요가 있다. 15살 아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리고 마흔다섯 살쯤 되었을 때도 같은 말을 물어보고 싶어졌다. 네가 무엇이 되고 싶어 했는지 아냐고 오늘을 잘 간직했다가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는데 그것은 다시 태어난 거야, 아니야? 묻는다. 나는 경사가 심하니까 발에 힘을 주고 잘 디뎌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고양이 나올 때부터 사실은 기분이 별로였다. 지금 이대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어~, 얼마나 듣기 좋은 대답이냐. 물론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다고 그럴 테지만.
겨우 산비탈에서 점심을 먹다니, 바람이 씽씽 부는 곳에서 연하게 타온 커피에 김밥으로 배를 채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저 위에서 먹고 내려왔을 것을 내리막에는 평평한 데가 전혀 없다. 얼마나 걸었을까, 얼마쯤 남았을까. 1시 반이니까 앞으로 4시간. 여기만 내려가면 다 해결이 될 거 같았다. 마을 길 걷는 거야 힘들 거 없다고 의기투합도 했다. 그러나 밥을 먹는 것도 고달팠다. 먹는 재미로 걷는데 순식간에 땀이 식고 손도 시려졌다. 내려가자, 내려가면 찻집이 나온다는데 거기에서 따뜻하게 뭐라도 마시자. 길마다 돌을 놓고 계단을 만든 사람들, 오늘도 어김없이 길이 위태로운 곳에서 돌계단을 만난다. 예쁘게도 놓인 돌들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듯이 어울린다. 너를 여기 가져다 놓을 줄 알았던 그 마음에 고마움 담아 찰칵. 또 강이를 세우고 물었다. 강이야 이 나무는 무슨 나무였지? 날씬하게 뻗은 나무는 껍질이 특이하다. 허물을 벗는 것처럼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졌다. 이거 둘레길에서 자주 보는 나무잖아. 저번에도 물어봤었던. 노····. 그래, 이제 알아보는구나. 노····. 노각! 노각나무! 하나를 겨우 알아가는 힘, 그것이 중요하다. 하나가 늘 어렵더라. 하나를 배우고 나면 그다음은 제힘으로 배우더라. 너도 이제 나무를 하나씩 알아가고 꽃들도 알게 될 것이다. 글이 더 쓰고 싶어질 것이다. 길었던 내리막이 방향을 꺾었다. 거기에서 세 사람을 찍었다. 엄마는 웃고 강이는 카메라 렌즈를 외면한다. 힘들다는 것이겠지. 그래도 나는 찍는다. 내가 말했잖아, 악취미가 있다고.
저 세 사람은 서로 편하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대화가 통한다. 한 팀이 되어서 세력을 형성한다. 나는 부지런히 그들을 찍는다.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서 내가 아래에서 셋이 계단에 앉아서 이쪽을 쳐다본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좋았던 시절 한때가 남았다. 아마 이 사진은 엄마와 아빠가 늙어서도 바라볼 것 같다. 좋은 날이었구나, 그럴 것이다. 하늘호수 차밭이 나오고 하늘호수 민박집이 나왔다.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표현을 눈으로 봤다. 산 아래 첫 동네는 아기자기했다. 마을이 나오면 마음도 푸근해진다. 사람은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홀로 존재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우리에게 그리움은 본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것들이 내 몸의 물기다. 많이 그리운 날에는 누구든 눈물이 흐른다. 내 물기가 다 마르지 않게 나를 지켜야 한다. 세월에 풍화되더라도 물기를 간직해야 내가 나로 머무를 수 있다. 처음 보는 산동네에서 너를 그리워하는 것, 불현듯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던 소리가 떠오르는 것, 잃어버린 고무신이 궁금해지는 것, 길에는 그런 그리움이 있다. 길이 다시 나눠진다. 아래로 가면 쌍계사가 나오는 길이고 우리는 옆길로 가야 한다. 그 이름 가탄 - 신선이 살면서 아름다운 여울에 낚싯대를 담갔다는 가탄加灘-에 우리도 점 하나 찍는 것이다. 다시 언덕을 오른다. 이쯤이야 얼마든지 올라가 주지. 고갯마루에서 쉬었다. 오늘따라 삶은 계란이 맛이 좋다. 누가 이런 거까지 챙겼는지, 참 고마운 사람이다. 누구? 그래, 나다. 내가 그랬다! 풍경이 좋다. 눈 덮인 능선이 아직도 보인다. 물이 흐르고 앞산과 뒷산 사이에 마을이 깃들어 있는 형세다. 풍수를 몰라도 보금자리형이다. 보는 사람이 평화로울 지경인데 거기 사는 사람은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쌍계사 십 리 벚꽃길이 아마 저기를 지나갈 것이다. 선이 예쁘다는 것은 모양이 좋다는 것이다. 선은 감출 수 없다. 눈빛도 착함도 모두 하나의 선이다. 거기를 지나면 정금마을이 나온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차밭이 그림같이 등장했다. 언덕 놓은 곳에 있는 집 대신에 차밭, 거기서 보이는 화개, 구름이 출렁거렸을까, 내가 출렁거렸을까.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 한꺼번에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상쾌했다. 둘레길은 참 볼 것도 많다고 아내도 좋아했다. 산이, 강이는 차밭은 처음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