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은 서프라이즈가 아무래도 더 반갑다. 가탄으로 가는 길에는 오르막도 많았다. 얼마나 높으냐가 문제지, 몇 번째 오르막인가는 벌써 잊은 지 오래다. 그저 올랐을 뿐인데 거기 예사롭지 않은 하늘길이 있었다. 태양도 서쪽으로 저만치 자리를 옮겨 앉은 시각, 정금 차밭 정상에 도착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정금 차밭이었구나. 보성에 다녀온 지가 언제였던가.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래전이다. 그 뒤로 이렇게 너른 차밭을 보는 것이다. 넓고도 높고도 가지런하다. 화개로 흐르는 시내가 은빛으로 반짝이지, 힘찬 산 근육이 쭉쭉 뻗어 내린 곳에 집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있지, 성산포에서 한 달만 살자던 그 마음을 나도 알겠다. 어떤 풍경은 사람을 붙잡는다. 손도 대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사람을 꼭 잡고서 놓지 않는다. 정금이 키워낸 차 맛은 어떤 맛일까. 은근하고 연할까, 진하고 향긋할까. 차 한 잔에도 바람이 불고 볕이 들고 물과 불이 모두 함께 등장한다. 사람을 위하는 일에는 온갖 정성이 드는 것을 이 언덕배기에서 나는 배운다.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뭇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에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 김민기 노래, 봉우리 中
차밭 가운데로 걸어보고 싶었다. 서른에 그러지 못했던 것, 마흔에 하지 못했던 이 소박한 걸음을 지금 걸어본다. 걸음마를 한다. 농부가 된다. 잠시 시인이 되고 노래도 한다.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지금 여기라고 나도 끄덕거린다. 저 세 사람, 오늘 파란 하늘이 한없이 어울린다. 나의 지금 여기, 저 봉우리들에게 나는 바다가 되어 본다. 하늘이 있고 봉우리가 셋 그리고 바다, 이 모습이었다. 오늘 우리가 길을 나섰던 인연은 바로 이거였구나. 유레카! 바람이 불어도 다사롭다. 발견은 언제나 유쾌하고 나도 겸손은 힘들다. 영화를 봤던가, 찍었던가. 그 기분으로 통통 발을 구르며 내려왔다. 곧 엄청난 사고가 일어날 줄 아무도 모른 채 흥겨워했다. 강이가 허공에 대고 외쳤다.
"어금니 한 번 꽉 깨물면 되는 거였어, 엄마!"
출발하기 전에 미리 말해줬다. 이번에 가는 곳은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곳이라 고생 좀 할 거라고. 그래도 가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연휴 첫날 가는 거라고도. 그 말이 무색하게 많이 힘들지 않았다. 지친 것도 없고 목이 마른 것도 아니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몸이며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다가 - 돌이켜보면 대부분 그랬던 거 같다. 길이 끝나는 곳에 와서는 떼를 쓰는 것 같다. 얌전하게 굴던 길이 방향을 휙 틀어 이쪽으로 가라고 그런다. 빨간색 화살표도 그때는 얄궂어 보인다. - 우리가 만난 대비마을 이정표.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이다. 아니, 아니, 저 산을 넘는 것은 아니지! 그래, 순식간에 온갖 것을 다 동원해서 담벼락같이 서 있는 산을 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시간상 우리는 곧 가탄마을에 도착하게 되어 있거든. 거기다 남은 거리를 봐도 한 시간이면 다 끝날 거리다. 안심해도 된다. 또 당했다고 경악하는 강이에게 절대 저 산은 넘지 않는다고 안심시켰다. 산이는 체력이 많이 좋아졌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강이를 챙기면서 걷는다.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강이를 맡는다. 마을을 지나오면서도 개 목줄이 풀렸다며 뒤처져 걷던 엄마를 기다렸다 같이 오는 소년이 됐다. 열여덟 살 남자아이가 엄마와 동생을 챙긴다. 산속에서 외치던 목소리가 내가 낸 것보다 더 크고 높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이름이 인상적인 대비마을 정자에서 다 드러누웠다. 끝났다고 알고 있는 데에서 마주치는 오르막은 그 어떤 오르막보다 막강했다. 옛날, 가라국 시대에 이 마을에 정말로 대비大妃가 머물렀단다. 그만큼 살기 좋은 곳이라고 정자 앞에 큰 비석에 설명이 되어 있다. 다행히 대비 마을 입구에서 옆길로 걷는다. 길가에 고로쇠 물을 받는 나무들이 죽 늘어섰다. 며칠 전까지 우리도 고로쇠를 마셨다. 고맙다며 매년 날이 풀리면 택배로 보내주는 덕에 내가 호강하고 있다. 아내에게 고맙다고 보내주는 선물을 내가 다 마신다. 고마운 것들은 사람들 사이를 이렇게 돌아다닌다. 복福은 그래서 살아서 움직이는 선물이다. 내게서 난 것이 세상을 돌고 다시 나를 찾아오는 선물, 그게 복인 것을 알겠다. 물병을 하나씩 달고 있는 나무들 사이를 지나면서 나무들도 고생한다며 끌끌 혀를 찼다. 그러다가 만난 삼거리 이야기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이야기해야지, 그냥은 입이 말라서 안 되겠다. 둘레길에서 돌아오고 이틀이나 지났는데 그 조그만 삼거리가 여전히 선명하다. 나와 아내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 변명이든 무엇이든 좋으니까 천천히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 덕분에 우리 네 사람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처구니가 없다. 가탄 3.3km 남았으니까 그대로 평지만 걸으면 한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다. 우리가 제법 높은 지대에 있으니까 당연히 길이 서서히 내려가면서 나오는 동네, 거기쯤이 종착지가 될 거라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힘든 건 다 끝났다고, 여기서부터는 즐기자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내리막길로 내려갈 채비를 막 마친 터에 삼거리가 나왔고 마침 또 화살표가 정말이지, 빨간색이 아랫길을 가리키는 거였다. 그래, 좋다, 좋아. 고생했다고 화살표도 예쁘게 이쪽을 가리키네. 아무 의심 없이 그 길로 걸어갔다. 한참을 가는데 애들이 휴대폰으로 물어온다. 길이 이상한데 그쪽이 맞냐고 묻는다. 두 번을 묻는데 맞으니까, 그대로 오라며 재촉했다. 그런데 다시 작은 삼거리가 나왔고 거기에는 이정표가 없었다. 가던 대로니까 이정표를 따로 두지 않았겠지, 그렇게 걸었는데 막다른 곳이었다. 그렇다면 아랫길이었네, 다시 돌아 나와 넷이서 아래로 걸었다. 곧 길이 다 끝나겠구나, 고로쇠 물을 채취하는 농장 같은 곳이었다. 길이 없는데도 거기가 길이라고만 여겼다. 지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그러면서 풀을 헤치다가, 이런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까, 거기! 우리가 위로 올라가지 않고 내려왔던 데, 거기 화살표를 잘못 본 거 같은데! 정말 그랬다. 내려갔던 길을 꾸역꾸역 다시 올라와서 여덟 개의 눈이 화살표의 방향을 확인했다. 우리가, 아니 내가 잘못 봤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눈이 본 것이다. 나는 이정표 뒷면을 보면서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보기 좋게 당했다. 앞에서 제대로 본 이정표에는 원부춘 10.0km, 가탄 3.3km. 그리고 이쪽! 헷갈릴 것 전혀 없는 안내목이었다.
"아이고, 나 때문에 고생이 심하네."
우선 그렇게 빌었다. 강이는 희망을 버린 표정이었다. 어금니를 그 사이에 6번 더 깨물었다고 그런다. 산이는 초연한 듯 상황을 정리한다.
"길은 다 힘들었어. 조금 더 걷는 것뿐이야."
아이들이 오히려 여유가 느껴졌다. 신경질을 부려도 도리가 없는 상황인데 장난을 친다. '뻥이요' 그 과자를 한 주먹씩 집어서 오물오물 씹으면서 마지막 오르막을 올랐다. 둘레길 15코스 마지막 오르막에서 내가 그랬다.
"거기에서 밑으로 이어진 길이 있었거든. 그런데 우리가 많이 좋아졌다. 그냥 가던 대로 가지 않고 돌아 나왔잖아. 몸은 더 힘들었지만 이만한 교훈이 없는 거 같다. 우리가 복을 받는구나. 봐라, 돌아서 여기까지 오니까 얼마나 뿌듯하냐."
뿌듯했다. 나도 그 길로 내려가고 싶었다. 이만큼 걸어왔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럴 뻔했다. 그런데 우리가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했을 때 정말 아무렇지 않을까. 다시 돌아가기 힘들어서 그 아래로 내려갔었잖아, 그렇게 아이가 물어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래서 다행이다. 제대로 끝마칠 수 있어서. 우리는 서로에게 믿음이 될 수 있을 거 같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기도가 솟았다.
해가 많이 기울었다. 우리와 하룻길을 동행한 그대에게도 복 있으라. 빛이 선해지는 시간, 가탄마을은 이제 0.5km 남았다. 집들이 다 근사했다. 여기는 산골이면서 산골이 아니구나. 나는 계단에 매력을 느끼는 타입인 듯하다. 어떤 집 계단이 보기 좋아서 오래 구경했다. 가탄마을, 보고 싶었다. 우리 오늘 잘 왔다. 반갑다, 그리고 고맙다. 삶이 고마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