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부에 놀러 다녀온 우진이 아빠는 좋아 보였다. 즐거웠다고 한다. 매연과 날씨 때문에 고생 좀 한 것 말고는 흡족했던 눈치다. 출발하기 전에 이것저것 걱정하던 모습과 전혀 딴판이었다. 다른 데도 가고 싶어 졌다고 그러는 것이 마치 껍질을 하나 벗은 분위기다.
나이가 들다 보니까 많은 것들이 늦다는 것을 자각한다. 결혼이 늦으니까 아이가 늦고 아이가 늦으니까 다른 것들도 같이 늦어진다. 늦는 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처리하는가,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나날의 색채, 풍경을 결정한다. 비교해서 실망할 것인가, 그래도 다행스러워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만족과 불만이 표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때 어느 기둥을 붙잡느냐에 따라 항해를 하거나 표류를 해야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고 싶을 것이다. 역시 속도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바다다. 방향도 별 의미 없다. 바다는 모두 이어져 있으니까.
함라산에 다녀왔다. 10년이 훨씬 넘게 다닌 곳을 어제는 다른 길로 올랐다. 함라 삼부자 집이 있는 동네를 걸어서 지났다. 거기 어딘가 흐드러지게 핀 벚꽃 속을 잊지 못한다. 아직 강이가 없었을 때 산이를 데리고 둘이서만 봄나들이를 했던 그날은 이제 환상 같다. 그 봄날을 생각하면서 마을에서 산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올랐다. 평소 우리가 다니는 길에 비해 거리는 짧았지만 오르막은 더 가파른 편이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질 때쯤 능선에 오르는 길이라 동네 사람들이 운동 삼아 다니기 좋을 것 같다. 하늘이 깨끗하고 공기는 상쾌했다.
월요일까지 설 연휴여서 4일 움직이고 다시 주말을 맞이한다. 주 5일 일하는 것이 피곤해지는 때가 올 것이다. 옛날에는 토요일에도 학교에 다녔었는데, 그때는 당연했던 것이 지금은 이상하게 보이고 너무한 것 같고 정말? 이런 소리를 듣는다. 나는 아직 그 시간 어디쯤에 서 있는 사람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거기 서서 지금을 바라보는 과거인이 내 정체성 아닌가 싶어서 말없이 여기를 바라볼 때가 있다. 마치 거울 속에 그 사람이 거울 밖에 있는 나와 조응하지 않는 것처럼.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런 환상, 착각, 오해를 깔끔하게 닦아낸다. 그런데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이 보이지 않고 깨끗해진 현장만 존재한다. 정리하거나 조사하거나 청소를 한 동작이 과감히 생략된 동작으로 글을 쓴다. 특이하다. 그리고 기분이 달라진다. 아직 좋은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선물' 같아서 계속 걸어 들어가는 여행객이 된다. 점점 여행객에서 등장인물로 육화肉化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엿볼까,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할까. 똑같은 상황에 장면은 완전히 다르게 펼쳐지는 선택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 남는다. 하지만 같이 있어도 결국 투명한 거울 속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야기를 다 볼 수 있게 꾸며주는 아니 에르노는 어느새 무대에서 사라지는 마술을 부린다.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소설을 끌고 가는 사람이 그때부터 '내'가 된다는 신비한 체험이 시작된다. 하늘이 투명하고 물이 맑은 곳에서 비춰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누구나 '자기'가 될 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문체는 그것을 해낸다.
적당히 늦었고 적당히 피곤해진 금요일 밤이었다. 냉장고에 넣어둔 캔맥주 하나는 곧 두 달째가 된다. 그것을 거기 두고 메모를 하고 있다. 아무리 마시고 싶어도 지금은 너무 이르다. 너무 이르다는 그 이유로 캔맥주는 건들지 않는다. 냉장고 문을 살포시 닫는다. 금요일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