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비교문학

by 강물처럼


"이럴 수가! 그가 보고 있는 그림은 바로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이었다. 실체가 무엇이든 소름 끼치는 그것은 매혹적인 도리언의 미모를 완전히 망가뜨리진 않은 상태였다."

1854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는 그가 사는 동안 '특이하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그가 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다 보면 생각 하나와 마주치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치는 그것은 두려움일지 반가움일지,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흐릿하지만 가까이 올수록 존재감을 드러낸다. 고대 테베의 오이디푸스에게 수수께끼를 냈던 스핑크스, 그 날개 달린 사자가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서 몸을 일으켜 묻는다. 물음 없이는 시대가 없다. 어떤 시대도 답을 가져본 적 없다는 믿음은 기막힌 등불이다. 그것을 들고 동굴 깊숙이 들어가 잠을 청하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가 된다. 파도 소리가 나는 동굴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치유법에 따라 나를 해부하고 들여다보고 고친다.

"영혼만이 감각을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감각만이 영혼을 치유하는 것"

물음이야말로 생명인 것을, 모든 생명은 묻는다. 묻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묻지 않는 생명은 기억이든 어느 곳이든 묻히고 만다. 오래 묻힌 것들은 보물이 되어 세상에 나온다. 그래서 가장 단단한 물음은 가장 찬란하다.

예술은 그 물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철학은 고개 숙인 채 땅에 무엇인가를 썼다가 지운다. 종교는 위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본다. 종교가 신학神學이라면 철학은 인간학人間學이고 예술은 둘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될 것이다. 다리의 성격과 목적을 정하는 것은 다리 자체가 아니라 다리가 걸치는 양쪽에 달려 있다. 협곡인지 바다인지, 보이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것인지, 어떤 것을 잇고자 하는지 다리는 고민을 해야 한다. 예술은 그처럼 고민에서 태어나고 고민하면서 고민을 낳는다. 예술이 낳은 것을 철학이 키우고 종교가 맡는다. 예술은 자유분방하다. 다리가 자유롭다면 그것은 역설인가 모순인가. 자유롭지 않은 다리를 건너는 일이 더 거칠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로 배웠다. 예술이 통제되거나 예술이 경직되었을 때 철학과 종교는 온전히 대립하고 맞섰다. 나는 자유로운 다리를 꿈꾸는 '특이한' 사람들을 존중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전혀 와일드 Wild 하지 않고 차분하게 묻고 있었다. 어제 만난 스핑크스는 나에게 수수께끼를 내기 전에 먼저, "두 조각의 빵이 있는 자는 한 조각을 수선화와 맞바꿔라."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전한다. 빵에도 꽃에도 깃들어 있는 종교는 봄날 창가에서도 눈이 부셨다. 따뜻한 그 말이 까칠한 바람 속에서 인상적이었다. 나는 기꺼이 빵을 내놓고 꽃을 든다. 내주고 얻는 것이 이만하면 든든하다. 마침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春分이었다. 결국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지기 마련인 세상에서 빵으로 꽃을 사는 일이 한순간이라도 공평 지게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 살아보는 일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소설 속 페이지에 적어 놓는다. 오스카 와일드에게 보낸다.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 같았던 그의 도리언 그레이에게도.

마음이 뛰면서 내가 뛰고 오스카 와일드의 스핑크스에 올라타고 논다. 나는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그는 오로지 예술로 종교와 철학까지 한 폭에 다 그려 넣었다. 먹 하나로 진하고 옅은 것을 드러내고 붓 하나로 가는 것과 굵은 것을 나타내는 유연함을 뽐냈다. 그가 그린 도리언 그레이를 미묘하게 편들었다. 그것은 마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도리언 그레이 대신 나이를 먹어가며 추악해지는 것과 비슷했다. 나도 그를 위해서 어떤 말이든 꺼낼 준비가 되어 있다. 환상적인 도리언 그레이가 원한다면 그 대신 악담을 퍼붓고 소리치며 길길이 뛸 것 같다. 비극인 줄 모르는 비극이 비극이고 웃기는 줄 모르고 웃기는 것이 희극이다. 사람의 욕망은 그래서 예술 같고 다리 같다. 어떤 날은 웃기고 어떤 날은 슬프다.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내놓겠다는 도리언 그레이의 바람을 대신 삼켜버린 초상은 누구의 얼굴도 아닌 - 종교도 철학도 예술도 아닌 - 얼굴이 되어간다. 누군가는 저 얼굴의 얼굴이어야 초상肖像이 될 텐데, 주인을 잃은 얼굴은 골방에 갇히고 천으로 덮인다.

그녀가 크게 불러 댔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연기가 제 인생 전부였어요. 극장에서만 살았던 거죠. 그게 전부인 줄 알았고 또 그게 진실인 줄 알았거든요. 어느 날은 로잘린드가 되고 어느 날은 포셔가 되었어요. 베아트리체의 기쁨이 제 기쁨이 되고 코딜리어의 슬픔이 제 슬픔이었지요. 그 모든 걸 다 믿었어요. 저와 함께 연기한 다른 연기자들이 저에게는 신처럼 느껴졌고 물감으로 그린 무대배경이 제가 아는 세상이었어요. 인생의 그림자만을 알면서도 그게 진짜라고 생각한 거예요."

도리언 그레이는 시빌 베인의 신파적인 행동이 우습다고 느꼈다. 오늘 오후까지는 아름다웠던 시빌 베인이 오늘 밤에 역겨워졌다. 영혼은 그런 실수도 저지른다. 감각이 너무 앞서거나 너무 뒤에서 따라올 때.

나는 아무래도 중학교 시절에 읽었던 김동인의 광화사가 잊히지 않는다. 멱살을 잡힌 채 흔들리면서, 죽으면서 순간 떨구어진 먹물 한 점이 눈이 되고, 그것이 눈먼 소경 처녀의 눈인 것처럼 화폭에 폭 담겼다는 경이가 나에게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원망을 담은 그 눈동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솔거는 - 세상이 주지 않는 아내를 자기의 붓끝으로 만들어서 세상을 비웃어 주겠다던 - 광인이 되어 방황하다가 돌베개를 베고 죽는다. 화가 솔거와 도리언 그레이, 소경 처녀와 시빌 베인을 위해 별이 빛나는 날을 골라 술을 내놓을까 싶다. 그 맛이 어떠냐고 묻고 싶다. 과연 누가 그 맛을 알 수 있을까. 그대는 술맛을 알 수 있는지 묻는다. 물은 맛있을까. 아름다움은 맛이 좋을까. 예술은 그럴까.

수선화는 이중적이어서 그윽하다. 자기에 빠져 죽고 자기에 빠져 성찰한다. 둘 모두 수선화가 가진 모습이다. 하루뿐인 날을 두고 이쪽으로는 밤이 길고 저쪽으로는 낮이 길어지는 심연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세상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나 소경 처녀의 눈동자나 사라지는 그 순간을 차마 놓지 못해서, 환하게 반짝였던 그 빛을 잊지 못해서 영혼이 애타게 부르는 감각, 그 감각이 깊은 데서 찾아 건져내는 나르키소스 아니었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