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짜리 여행 2 - 2020.0814
우리가 잘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거잖아.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제각각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별일 아닌 것처럼 순식간이었다. 8월 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번개 같은 속도다. 방학이 따분하던 참이었던지 그 흔한 군소리도 없다. 아침부터 어딘가에서 맴맴, 매미 우는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오늘은 어디로 갈까.
하루짜리 나들이는 이렇게 모두가 함께 움직이는 지점에서부터 그 이야기가 전개된다. 모든 것을 혼자서 준비하고 챙겨야 한다면 제시간에 출발은커녕 분위기부터 흐려져서 위험하다. 어르고 달래느라 기운을 뺏기고 참견하고 간섭하면서 밖에 나가고 싶던 마음이 다 사라지고 만다. 귀찮아지면 무엇보다도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래서 하루짜리 외출일수록 자립적이고 독립적으로 받아들이며 단출하게 준비해야 한다. 서로가 매력이 있어야 한다. 대추와 잣, 바늘과 실, 해와 달과 별, 하늘과 바다와 땅처럼 조화로운 일치가 중요하다. 나는 물을, 나는 빵을, 나는 파라솔을 나는 튜브를, 그런 합창이 울려야한다. 거기에 하늘이 맑고 좋으면 화음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어떤 날도 대신할 수 없는 오늘 하루를 보내겠다는 설렘, 믿음 그리고 평화 같은 것이 비누거품처럼 향기도 좋게 일어난다. 평화 平和, 누구나 좋아하는 말 - 빠진 데 없이 공평지게 平, 밥禾을 먹는口 일 - 을 나도 쓴다. 우리는 골고루 먹기로 한다. 산다는 것은 세상을 밥처럼 챙겨 먹으면서 비로소 내가 되어 보는 일이 아니겠냐고 용기 있게 써 본다.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마음에 담겼으면 좋겠다. 나중에는 그 마음 하나를 보여주면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만하면 잘 살았지요? 그러면서 혼잣말하던 '국제시장'의 덕수처럼 말이다. 상념이 길다. 소풍 가는데 짐 다 싸놓고 뭐 하는 것인지.
얼굴도 시원하게 씻었으니까 자외선 차단제도 바르고 길을 나섰다.
- 산이야,
음악을 듣고 그림도 좋아해라. 가능하면 한 걸음 더 걸어보고 이야기할 때는 더 듣고 자주 소풍을 가서 풍경과 하나가 되어라. 여행은 특별한 짐 싸기가 아니고 우리 사는 일이 여행이다. 초콜릿이 좋으면 만들어 보고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는 끊이지 않는 유머를 선물하고!
내 휴대폰에는 2012년 8월 14일에 찍은 아이 사진과 짧은 글이 남아 있다. 그때도 오늘이었구나. 8월 14일에는 우리가 계곡에 다녔었구나. 양산 어느 숲속이었다. 전라도에서 멀리 경상도까지 지치지 않고 달렸었구나.
고기를 재고 차 트렁크가 빼곡할 정도로 짐을 싣고서는 절대 가벼울 수가 없다. 하룻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구석이 있다. 바람이 드나드는 헐렁함이 생명이다.
"사람들은 가난한 마음에 살면서 바구니 밥과 표주박 물로 살아가는 삶을 견디기 힘들어하는데 안회는 오히려 그런 생활을 즐기고 있으니 현명하구나, 안회여!"
걸음은 가벼울 것, 삶의 가치 또한 그와 비슷할 것이다.
하룻길에서 우리는 기꺼이 나그네가 되어 구름을 흘려보내고 냇물에 몸을 씻어보기로 하자. 동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진안 가는 이정표가 나오면서 곶감으로 유명하고 물이 좋은 완주군 동상면 골짜기가 나왔다. 지리산 뱀사골만큼은 아니더라도 여기도 더위를 피하러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벌써 길가에 차들이 빼곡하다.
일이란 것이 결국은 믿는 대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야트막한 물에 비교적 한적한 자리가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나 한 듯 손을 벌려 우리를 맞았다. 건너편에 나무 그늘이 진 것도 마음에 든다. 오늘은 여기가 천국이다. 계곡이 좋은 것은 자연 상태 그대로 푹 몸을 담그는 맛이다. 물소리하며 찰랑거리는 물빛에 바로 옆에서 물잠자리가 날아다니고 까르르 떠드는 소리가 예쁘게 들린다. 우리 집 꼬마들도 아우성이다. 동물원 다음으로 계곡을 좋아하는 것 같다.
산이와 강이는 벌써 물속에 들어갔다. 튜브 없이도 둘이서 신나게 자맥질이다. 물을 좋아하는 나이들, 급하다. 급해. 그래도 준비 운동은 하고 들어가야지, 저렇게 좋을까.
이런 광경이 여름에는 가장 보기 좋다. 나는 천천히 돗자리를 깔고 간단한 것들을 옮긴다. 요즘 한창 읽고 있는 로마인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가져온 것이 마음에 든다. 아이들 먹을 과자도 옆에 챙겨 놓고 튜브에 바람을 넣었다. 오렌지색 작은 아이스박스에도 그럭저럭 마실 것이 들어 있다. 복숭아도 서너 개, 빛깔도 좋은 자두도 있다. 언제 챙겼나 싶은 것이 바로 여자하고 남자의 다른 점이다. 아무리 가벼워도 먹을 것은 먹어야지, 그래 맞다. 살아가는 데는 필요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필요한 것들 때문에 산다면 어쩐지 불편하다. 그 경계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진짜 과제가 아닐까 싶다. 빵도 있고 햇반도 있고 라면도 있고 그리고 저 신난 얼굴들 봐라. 오늘 우리는 부자다.
아이들이 물속에서 오리처럼 꽥꽥거린다. 저희끼리 잘 논다. 돌을 주웠다가 찾고 물을 쏘기도 하고 쫓아가고 도망 다닌다. 때맞춰 울리는 매미 소리가 여름 한낮을 한층 싱그럽게 만든다. 다른 무엇이 이것을 대신할 수 있을까.
물끄러미 아이들의 시간을 바라보며 그 추억 속에 내가 서 있는 모습도 들여다본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시인의 꿈을 꾸던 윤동주처럼 나도 슬쩍 푸른색을 돋아낸다.
-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왔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 윤동주 <자화상>
푸름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하늘이 높다랗게 높다랗게 높아졌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아빠는 자주 잠이 오는 사람이잖아. 운전하느라 쉬지를 못해서 기운이 떨어진 거니까 따로 놀라지 않아도 된다. 수술을 한 지 3년, 아직도 종종 기운이 떨어진다. 그러면 쉬고 쉬고 나면 괜찮아진다. 그러니까 다행이지 싶다.
엄마도 젊은 엄마가 아니라서 너희에게 미안해하는 구석이 많은데 그나마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동안에도 우리는 얼마나 즐겁게 하루짜리 여행을 실천해 왔었냐. 그 순간들이 모두 너희들 모습 안에 깃들어있는 것 같아서 좋다. 고맙고 대견하고 감사하고 그런다.
미안하지만 이번 라면은 최악이었다. 어지간하면 밖에서 끓이는 라면은 맛있기 마련인데 내가 너무 함부로 대했다.
2시부터 5시까지 물속에서만 놀던 너희에게 내가 내놓은 라면은 기억에 남을 만큼 맛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물을 너무 많이 넣었나. 매울 것 같아 물을 중간에 넣었던 것이 실수였다. 강이를 위해서 그런 것인데 정작 강이는 싱겁다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너희는 별 상관없는 듯 금방 다시 물에 들어갔지만 나는 영 아쉬웠다. 라면도 뜻대로 안 끓여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여태 나름 아마추어 요리사 정도는 된다고 믿고 살았었는데······.
어렸을 적 같이 헤엄치러 다녔던 동무들은 모두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친구라는 말 대신 동무라고 써보는 것도 처음이다. 그 친구들은 동무였던 거 같다. 나이도 서로 다르고 형도 동생도 한 무리를 이루어서 멀리까지 수영하러 다녔었는데. 과연 그것은 수영이었을까 생각한다.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 없이 다들 어떻게 물에 떴는지 신기하다. 물도 무서워하지 않고 깊은 데도 건너다 오고, 생각하면 위험한 줄도 모르고 그렇게 다녔던 시절이다.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시절 내가 배운 것은 수영이 아니었다. 꼬마들끼리 알려주는 작은 기술들(?)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저 건너편에 갈 수 있는지, 내 관심은 그거였다. 나는 그날 이후 새로운 사람이 된다. 드디어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스스로 터득한 것은 너무나 단순해서 이렇게 소개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다. 그런데 분명히 그날 이후 나는 아무 데서나 풍덩 뛰어드는 사람이 되었다.
키 넘으니까 여기는 넘으면 안 돼, 그것이 규칙이었다. 그 규칙 하나만 지키면 아무 일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한 마리의 조나단 리빙스턴이었구나. 겁이 났다. 그래도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갔다. 금방 키가 넘으면 뒤로 물러서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날 운이 좋았던 것이다. 급하게 경사지지 않고 물밑이 완만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데 무섭지 않고 적응이 되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몇 센티미터씩 깊어졌다. 이제 여기서 한 벌 더 걸어 들어가면 물이 머리 위에 있겠구나. 가늠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 방법은 적중했던 것이다. 다시 뒤로 한 발, 이렇게 하면 물이 키가 넘지 않고, 다시 앞으로 한 발, 이것은 키가 넘는 상태. 나는 충분히 그 경계가 익숙해질 때까지 즐겼다. 그리고 두려움을 하나의 관념으로 대할 수 있게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물이 주는 두려움은 이런 형태였다고 자각한다. 긴장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우친 것이다. 그리고 손을 이렇게 발을 이렇게 휘젓기만 해도 몸이 뜬다!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어서 사람들한테 자랑할 만큼은 못 되고 그렇지만 아무리 깊은 물이라도 헤엄칠 수는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런 것이 '나그네'가 되는 지점 아닌가 싶다. 봄꽃이 그렇듯이, 있었던 듯 없었던 듯 가물가물하게 다가오고 떠나가는 순환 같은 것 말이다. 하여튼 나는 물을 보면 그때가 떠오르고 내가 물에 들어가는 순간은 늘 아이 같다고 여긴다. 풍덩, 삶이 내는 젊은 소리. 그 소리가 오래된 앨범처럼 소중하다.
산이에게 언제 그 이야기를 해줄까. 아이는 언제쯤 수영을 하게 될까.
삼겹살은 집에 와서 먹으니까 편하고 좋았다. 아빠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일어설 줄 아는 엉덩이가 여행하기에는 가장 좋고 책을 읽을 때에는 진득한 엉덩이가 어울린다고. 걸을 때는 흔들면서 걷는 엉덩이가 더 재미나는 법.
장마가 길었다는 것도 너희는 다 잊을 거야. 우리가 다녀온 모든 하룻길을 다 잊고 너희는 하나의 무늬로 바라볼 것이다. 오늘이란 시간 속에서 째깍째깍 새겨진 기억들이 세포처럼 너희가 바라보는 무늬를 구성할 것이다. 숨을 쉬는 그림, 손짓하는 그림, 이야기를 속삭이는 그림을 그리는 너희가 될 것이다. 그림도 좋은 동무가 되어 같이 길을 가는 그림은 아빠가 그려보고 싶다. 덕분에 오늘 즐거웠다.
일요일 저녁에는 작은 아빠네가 오기로 했다. 다음 월요일이 벌써 기대된다. 너희가 더 어렸을 때 하루씩 놀러 갔던 서해 소나무 숲에 가기로 했다. 바다 바람 부는 곳에서 해먹을 타고 놀던 거기, 거기에 가면 강이가 아직 걸음마를 다 떼지 못하던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까불거리며 파도가 철썩일 때마다 도망치다 도망치다 엄마한테 안기던 산이는 또 얼마나 예뻤겠냐.
옛날 웃음소리를 들으러 또 새 웃음 지으러, 가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