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좀 즐겁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어떤 것 - 그것은 자기 안이든 밖에서 생겨나는 것이든, 결국은 외부요인이다는 의미에서 - 때문에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는 존재다. 한 주만 더 이러고 있으면 4월을 통째로 '허리'를 붙잡고 보내게 된다. 내 요통은 여자들의 생리통처럼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내가 더 운이 좋은 편이다. 1년 넘게 아무렇지 않게 지낼 때도 있으니까, 깜깜무소식이어도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으니까.
그래도 오래 같이 있으면 그게 뭐든지 정이 든다. 정情은 '아홉'이다. 지난 총선 때 비례 순번 9번을 받고 그것을 '정情'이라고 읽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그 대목의 출처를 아는 것만 같아서 미소가 지어졌다. 저거 어떤 엄마가 귀띔해 줬구나!
강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이야기다. 학교에 다녀오면 늘 싱크대 아래 칸을 열고 자기 '과자'를 찾아서 먹던 강이에게 내가 물었다. 강이야, 너 이거 어떻게 읽는 줄 알아?
촘!
자신 있게 읽는 아이만큼 내 웃음도 컸다. 너, 그게 그렇게 보이는구나.
이거 '참'이라고 읽어, 참 크래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이번에는 초코파이가 있었다.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 참 크래커 이후로 자꾸 확인하고 싶어졌다. 다 아는 것처럼 초코파이 봉지에는 커다랗게 情이라고 약간 흘려 쓴 글자가 있다.
'아홉'
이번에는 저번처럼 힘주어 말하지 않고 살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뗐다. 아하, 아하, 그러고 보니 아홉 같았다. 이렇게 아, 이렇게 홉, 아홉!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선거 덕분에 떠올랐다. 나도 그렇게 배운 글자들이 많다. 일본어나 중국어를 배울 때 우리가 쓰지 않는 한자들이 나오면 난감해진다. 이거 어떻게 외우지? 마땅히 외울 방법이 없다. 언어에도 그런 공간이 있다. 막다른 곳에서 발견하는 - 호그와트 마법 학교로 가는 런던의 킹스크로스 역 9번과 10번 승강장,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 통로가 있다. 그것은 차원을 다르게 비춰보는 유리병 같은 것이며 평면을 굴절시켜 다른 차원을 걷게 하는 뫼비우스의 경험 같은 것이 된다.
나에게 없는 글자,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렇게 나에게 없는 세상을 하나씩 주워 담는 작업이다. 언어에는 생각과 감정, 시간도 담겨 있지 않던가. 그 사람의 언어를 내가 바르게 이해하는 동작, 나는 AI에게 그것을 맡기고 싶지는 않다. 아이들과 영화를 보면서 깨알 같은 감정들이 내 안에 있는 무수한 선들을 타고서 메시지를 전한다. 지금은 저 말이 필요해, 꼭 저 말이어야 해.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이 스토리를 채우고 작품처럼 영화를 본 우리를 남긴다. 오렌지처럼 새콤하고 사과처럼 아삭거리던 영화 속 대사들이 우리 안에서 영양소가 된다.
정확하게 말하는 AI와 바르게 말하려는 우리는 2차원과 3차원처럼 나란히 가지만 다른 경험으로 살아갈 것을 믿는다.
어린 강이는 그렇게 아홉으로 초코파이를, 촘으로 참을 간직했던 것이다. 거기에 희망이 있어 보인다. 틀린 것이 아니라, 잘못이 아니라, 재미나서 흥미로워서 사람에게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공간이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 -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같이 - 세상을 다르게 볼 줄 아는 사람들이 만들어갈 세상을 상상한다. 미세 플라스틱과 미세 먼지로 가득한 여기를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은 무엇이 될까.
다시, 오래 같이 있으면 정이 든다, 거기에서 이쪽으로 가자. 무엇 때문에 기분이 좋은지 들어나 보자.
그렇게 소식이 없던 것- 비록 통증뿐이더라도- 이 어쩌다 한 번 찾아오면 정성으로 대접해 주고 떠날 때까지 싫은 얼굴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아플 때가 됐다든지, 이만해서 다행이라는 말로 살살 달래면서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다. 물론 나도 사람인데 짜증스럽고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속에서 올라올 때는 화장실, 해우소解憂所가 최고다. 조용하고 쾌적하고 속에 것들을 쏟아내라고 일부러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던가. 파도가 그치듯 마음이 잠잠해지면 얼굴 한 번 씻고 탁탁 손 털고 나오면 또 며칠 지낼 만하다. 적어도 10년 넘게 서로 알고 지낸 만큼 은근한 배려 같은 것도 없잖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랬었구나, 끄덕이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4월도 다 가고 일주일 남았는데 어제는 모현대교를 걸어서 건널 정도가 됐다. 누워서 물리치료를 받느라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눌렸는데 그래도 걷고 싶었다. 4월에는 통 바람을 쐬지 못한 것 같아 고개를 젖혀 하늘도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아내에게는 천천히 걸어갈 테니 다리 건너 삼계탕 파는 데서 보자고 했다. 걷지 말라며 금방 태우러 오겠다는 것을 괜찮다고 밀어붙였다. 아내가 하는 말은 아홉 번쯤 듣고 한 번은 듣는 척만 하고 지난다. 어, 어? 잘 안 들리는데.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휴대폰을 멀리 떨어뜨리면서 끈다. 이것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중에 하나다. 별거 아닌 것들이 좋아 보일 때, 그때 바람이 부는 것이다. 다르게 부는 바람, 천 개의 바람 같은 바람. 보도블록이 정겹고 도로 위의 차들이 번거롭기는커녕 그쪽을 쳐다보며 걷는다. 손이라도 흔들어줄까. 잠시 신호등을 기다렸다가 튤립이 잘 자라고 있는 화단도 지나왔다. 다리가 이렇게 경사가 진 것이 반갑다. 나는 늘 도로 위에서 차를 멈추고 신호를 기다리느라 다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이 다리 아래로 기찻길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 너른 땅이 숨어 있을 줄이야. 거기 밭을 만들어 파며 마늘을 심어놓고 기르고 있었다.
며칠 전 주문했던 책이 세 권 도착했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쉬면서 보라고 산이에게 권했다. 지난 3월부터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가족 채팅방에 하나씩 소개를 하고 있다. 어제도 내가 소개한 블로그 기사 제목은 '장난꾸러기 안도타다오!'였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고 -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는 있어도 뒤돌아 가서 옛날을 다시 만날 수는 없어서 가끔씩 지구본에 손가락을 대고 둥글게 맴을 그릴 때가 있다.- 여기로 돌아가면 그래서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할까. 나는 꿈이 없었다. 무엇을 꿈꿔야 할지 몰랐다. 다시 돌아가면 꿈 없이 사는 나를 데리고 어쩌면 킹스크로스 역에 갈지도 모른다. 여기서부터는 네가 찾아야 한다고 말해주면 어떨까.
안도 타다오는 나도 조금 알고 있는 건축가다. 건축은 어떨까? 하고 허공에 물음 하나를 던졌던 밤이 있었다. 화학공학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산뜻하게 들리지 않았었다. 갈 데도 많대, 나는 여태 살았는데도 그런 말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너는 좋냐? 싫지는 않아, 그 말이 무슨 힘이 있을까 싶었다. 학교와 학원만 쫓아다니느라고 시간이 없는 아이가 무엇이 얼마나 좋은지 어떻게 알까. 다 부모가 능력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입에서 쓴맛이 났다. 더 너른 세상을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그렇게 몇 번인가 더 물었던 거 같다. 그대로 괜찮겠냐?
그러다가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 이야기가 나왔고 너는 어렸을 적부터 뭐든지 잘 만들었다는 증언과 기억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짓는 일, 건축은 어떨까? 그렇게 시작했다. 우선 집에 있는 책을 - 짐작으로는 그래도 건축에 관한 책이 몇 권 있을 줄 알았는데 - 뒤졌다. 산이가 볼 만한 책은 여덟 가지 사조로 읽는 20세기 건축이라는 소제가 붙은 책 한 권이었다. 다른 책은 일본어로 됐거나 사찰을 소개하고 있어서 뒤로 뺐다.
안도 타다오는 건축가가 될 줄 꿈에도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다. 오사카 허름한 곳에서 태어나 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트럭을 몰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 우연이라는 말처럼 폭이 넓고 깊이가 있는 말 좀처럼 마주치기 힘들다. - 서점에 들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은 다시 몸을 비튼다. 그는 어쩌다가 '건축' 코너로 갔을까. 거기가 혹시 호그와트로 가는 또 다른 통로 아니었을까. 한 번 더, 미소를 짓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바로 '운명'이다. 우연이 운명으로 모습을 바꾸는 순간이 펼쳐진다. 그는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르코르뷔지에'
밤늦게 공부하다 돌아온 아이가 잠들기 전에 책꽂이에서 찾아준 책을 보고 잤던지 매트리스 옆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그날 아침 글을 쓰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어떤 이의 이야기가 내 귀에 앉았다. 프랑스 건축가, 늙은 부모를 위해 스위스에 직접 지은 작은 집 이야기였다. 내용은 금방 흘러가버려서 기억나지 않지만 리듬은 생생하게 남았다. 피천득의 수필처럼 5월 맑은 물에 세수하고 일어서는 청년이 그 안에 있었다. 누군지 자연 닮은 건축가였구나. 그 이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멈춰서 다시 한번 이름이 나오길 기다렸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찾아봤다. 연결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 아직 그 순간은 예감의 예감이었을 뿐, 아무 형태가 없었다. '산이에게 필요한'이라고만 메모를 했다.
로마에 가본 적 없지만 전주 한옥마을에 가면 전동 성당 앞에서 꼭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우리나라에 유일한 건축물이야. 여기가 그 유명한 로마네스크 양식이야. 벽이 두껍고 창문은 작지. 그리고 입을 닫는다. 거기까지만 알고 있으니까. 내가 아는 건축은 그런 것이다.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지만 봤으면 싶고 알고 싶은 영역이다. 알아볼 줄 아는 눈을 가졌으면 싶은 대상이다.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있는 몽생미셀이 겉표지에 야경으로 찍힌 사진을 보고 하루치 일당의 절반을 내고 그 책을 샀다. 아직 일본어도 제대로 모르면서 언젠가 읽을 날이 있을 거라고, 아마 언젠가 여기 이 지점에서 똑같이 몽생미셸을 바라보겠다는 꿈을 꿨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건축은 내게 그런 대상인지도 모른다. 가까이하기에 너무 커다란 존재, 친해지고 싶지만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그녀의 미소 같은.
노출 콘크리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 - 방금 생각했다.- 소바 집이다. 저번 주 목요일에 들렀던 우리 동네에 있는 거기 소바 집, 완전 노출형은 아니고 그와 비슷하게 분위기를 낸 정도지만 역시 시원한 소바를 먹기에 어울린다. 안도 타다오는 그런 식으로 우리 일상에 도움을 주고 있는 건축가다. 지난 연말부터 제주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 아직 지리산 둘레길 완주까지 다섯 코스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 올레길을 걸으러 갈 때에는 안도 타다오가 만든 건물에도 들러봐야겠다. 그의 넉넉한 미소는 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의 꿈을 구경한다. 그러면서 나도 같이 꾸는 꿈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승효상 씨를 보러도 가고 싶고 스페인에 가면 얼마나 위대한 거인이 있던가. 구마 겐고라는 사람도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것들이 새싹처럼 돋아난다. 이거 좋은 꿈 맞다. 자꾸 웃음이 나는 것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