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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y 20. 2024

오월 예찬 feat. 피천득

某也視善


푸르다. 오월이라고 쓰고 맨 먼저 떠올렸던 말이다. 계절에 맞춰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오월이 시작하는 날에는 그에 어울리는 '푸르다'를 꺼내 한껏 분위기를 띄웠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고 그랬는데 내가 꾸미는 오월은 푸른빛이 도는 화병처럼 맵시가 난다. 맵시라고 하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면서 맵시 있기를 바라는 것이 일찍 엄마를 잃고 평생 엄마를 그리워하던 이의 검은 눈동자에 비치던 그믐달 같다. 달에는 빛나는 환희가 있으면서 회색의 우울이 있고 그 우울을 따라 흐르던 보라색 고요, 고요를 토닥이던 희고 따뜻한 손도 있다. 달밤, 오월 밤이 내미는 손은 영영 잊을 수가 없어서 땅에 발을 박고 나팔꽃 줄기가 타고 오르는 말뚝이 되었다가 깨어나는 꿈, 흩어지는 나, 꾀꼬리가 지키는 마을을 지나갈 때마다 노래를 부르는 너를 듣고 있는 수필 같은 나무들 사이를 거닌다.

달에서 봤던 그 손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평화가 되어 평화로 산다. 가난한 이가, 슬픈 이가 그리고 달빛만큼 먼 데서 사는 이가 가깝게 다가와 곁에 머무는 계절, 이팝나무 아래서 세어 본 오월은 언제나 세월이었다.

-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 피천득 오월 예찬 中

어제도 꽃향기가 났다. 늦게까지 볕이 그 집 마당에 머물고 있던 남향으로 지은 집이었다. 오렌지 기와로 지붕을 얹은 그 집 앞에서 향기가 맡았다. 지난주에도 함라산에 오르다가 찔래 향에 정신이 깊이 찔리고 말았었는데, 그때 쓰러지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는데···· 어제 그 달달하고 오붓하고 아늑했던 꽃 향의 순간을 떠올리면서 글을 쓴다. 오월은 이렇게 자꾸 사람을 쓰러뜨리고 있다. 어떻게 더 멋지게, 더 꽃같이 추락할 수 있을까, 어떤 날에 불꽃같이 산화할 수 있을까. 꽃으로 달래고 향기로 어르는 이 벌판에서 벌이는 전투는 끝나지 않기를, 오후가 끝나가는 6시 무렵에 그 길가에서 폴레폴레*, 하쿠나 마타타*, 라이언 킹에서 나왔던 예쁜 말을 속삭였다.

그래, 빛으로 나아가자. 아무도 겁내지 않는 두려움, 경외감이나 무상감無常感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아마 5월 어느 날일 것이다. 거대하면서도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것이 향香이 가진 아름다움이다.

-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 피천득 오월 예찬 中

피천득 선생님은 세상이 평온하기를, 그 바람이 묻어나는 문장을 평생 빚고 다듬었던 듯하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과 세상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고 차이가 없어 보인다. 딸이며 음악, 글이며 삶이 그림 속의 그림같이 환상적이며 사실적이다. ' 속'을 보여주는 눈동자와 문장, 오월에 꼭 맞는 깔 맞춤이다. 이렇게 옷 한 벌이 잘 갖춰졌다.

오월에는 바람이 통하는 길목에 앉아 시간을 잊어버리고 그분의 '인연'을 한 줄씩 읽어 보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다. 한 대목을 읽고 장면 하나를 떠올리고 한 대목을 읽고 이번에는 내 옛날을 생각하며 하루를 온통 다 잊었다가 마침내 일어나고 싶다.

아이들 일기를 쓰다 말고 하늘을 내다본다. 오늘 5월 20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이다. 오월에 빛을 입히고 그 맵시를 보고 싶어 하는 나 같은 사람은 늦가을 깊은 밤이나 눈 내리는 이른 아침에는 어떤 하소연을 쏟아낼지 궁금하다. 어쩌면 가을이나 겨울 속에도 오월을 장식해 놓고, 본 적 없고 볼 일도 없을 것 같은 아름답고 멋진 것을 보게 되는 행운을 기다리는 줄도 모른다. 어쩌면 31일이나 있는 오월에, 태어나고 죽는 날부터 맑고 흐린 날까지, 색색으로 꾸며놓고 세상의 온갖 과일을 팔고 싶은 것인 줄도 모른다. 칵테일을 한 잔씩 팔기로 할까. 하여간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대를 뛰어다니며 공연을 하는 광대의 심장을 나눠 갖는 일이다. 스스로 즐거운 술래는 남 보기에도 재미있어 보이는 법. 거기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오월은 바다도 되고 바다 밖으로 뛰어들어가는 하늘도 되어 사람을 다치지 않게 감싸준다. 바다로 난 창窓은 하늘, 하늘로 난 창窓은 바다, 오월이 건네는 선물은 그런 식이다. 실컷 어디서든지 푸를 대로 푸르러라 허락한다. 사랑도 그와 같다면 꽃이 되고 향기가 되어 나비도 벌도 찾아들 것이다.

- 得了愛情痛苦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 피천득, 오월 예찬 中

그때 가끔 시적詩的이라며 나부끼는 감상이 마음에 든다. 계절을 통으로 빌려서 거기에 깃발을 꽂고 왕국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왕을 모시는 것이다. The Queen of Queens, 여왕들의 여왕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마차를 몰 것이다. 옷에다 금박 은박을 달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표정은 오월을 고를 것이다. 바퀴가 놀라지 않게 마차가 덜컹거리지 않게 온 마음으로 푸르름을 길 위에 깔고 릴케가 시를 쓰듯이 폼을 잡고 진지하리라. 깨죽나무며 병꽃, 국수나무, 마삭줄, 애기똥풀까지 다 마차에 태워 세계가 되게 하리라. 나의 여왕은 이 계절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니까. 이 행진은 여름으로 가는 청춘이구나. 그래서 스물한 살이었구나. 모든 기도에는 호위병처럼 아멘을 딸려 보낸다. 그가 보호하기를 바라면서, 모든 기도에는 May로 청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오월은 그 마음이 계절이 되고 날이 되고 달이 된 신화다. 나는 오월에 있다.

-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피천득 오월 예찬 中

*폴레폴레 - 스와힐리어 '천천히 천천히'

* 하쿠나마타타 - 라이언 킹 애니메이션에 나온 스와힐리어 '문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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