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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May 31. 2024

열 걸음 속에 문학 -1

某也視善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가만있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말 - 생미셀, 라스트 콘서트에 나왔던 OST 같이 사람을 공중으로 높이 띄우는 - 이 있다.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어떤 분위기, 어떤 나라, 어떤 색, 물어볼 만한 '어떤'은 무척이나 많다. 아마 호감이 가는 만큼 물어보고 싶어질 것이다. 질문이 많은 사람이 있고 질문이 깊은 사람이 있다. 누가 더 상대를 좋아하는 걸까?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질문이 깊은 편이 좋다. 대신 깊어도 무섭지 않아야 한다. 좋아하는 만큼 배려한다는 말이 질문과 질문의 방식에도 적용된다.

생각 없이 소비되는 질문들이 많다. 무턱대고 문을 두드리면 안에 있는 사람이 놀랄 수도 있고 때로는 겁을 먹기도 한다. 그게 어떤 질문인지 먼저 살피는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먼저 자신에게 질문할 줄 아는 사람들은 상대를 이방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상대를 자기와 동등하게 바라보고 자기를 상대의 시선 속에서 바라본다. 그래서 막 하지 않고 막 대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지요?' 우리에게는 그 장면이 역사처럼 남아 있다.

무겁기만 한 질문도 별로다. 깊은 질문을 상냥하게 혹은 부드럽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드물지만 있다. 독특하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아예 없지는 않다. 그런 사람들이 렘브란트가 되고 고흐가 되고 피카소가 되는 법이다. 누가 이렇게 물어오면 적어도 그날 하루는 그 질문과 그 표정이 나를 끌고 다닐 것 같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하루 쉬기로 했다는 아내는 무엇을 하며 쉬고 싶었을까. 다시 어제를 돌아본다. 평일은 대체로 무난하고 조용하지만 목요일은 더 한적한 분위기가 난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단출하게 떡 두 조각, 물 두 병 그리고 오렌지 하나를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차에 타면 FM 라디오가 켜진다. 가끔은 동화 같은 상상을 한다. 비가 음악처럼 쏟아지는 거리, 아니, 음악이 비처럼 쏟아지는 거리. Kiss the Rain, 건반 하나씩 손으로 건들 때마다 허공에 길이 나고, 길이 생기는 대로 음音이 연달아 매달리고, 거기 불이 켜지고, 마침내 활주로처럼 그 위를 달린다. 음악가들은 정말 태어났겠구나. '음악이 있는 곳에 악이 있을 수 없다.' 세르반테스의 그 말에 백 점을 준다. 볼륨을 높이고 달렸다. 걸으러 호수 있는 데로 달렸다.

'누가 봐도 아저씬데, 아저씨가 아닌 거 같아서 가끔 멋쩍기도 해.'

그러기도 하겠다며 옆에 앉은 아내가 웃었다. 다시 태어나면 음악 하면서 살라고 충고도 아끼지 않는다. 그럴까? 이루마와 앙드레 가뇽, 그 사람들 이야기를 하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몇 마디 안 한 것 같은데 늘 이야기가 시작되면 길이 가까워진다. 사람도····.

그래 맞아, 으아리도 종류가 많았다. 다른 꽃처럼 동그랗게 모양을 갖춘 것도 있고 바람개비같이 꽃잎이 네 개로 펼쳐진 것, 작은 별들이 한 데 모여 있는 것처럼 피어 있었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마주친 하얀 꽃을 보고, 으아리였던가? 내뱉은 말이 시작이었다. 하필 으아리였을까. 아내는 그런 꽃도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대충 생각난 대로 그리고 입이 저 혼자서 나불거린 것이 고스란히 내 책임으로 떨어졌다. 한두 해 전에도 내가 일부러 찾아보고 알아뒀었는데 이거 참 면面이 서지 않는다.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가 그랬단다. 같은 반에 마음에 드는 남자아이가 있는데 왜 좋냐고 그랬더니, 정말 있는 그대로 그 아이의 '앞면'이 마음에 들어서! 그러더란다. 내 앞면이 살짝 찌그러지는 듯했다. 잘 펼 수 있을까. 얼마면 될까. 그냥 지나치지 말고 다시 또 확인하는 것이 몸에도 마음에도 좋다는 것을 요즘 매일 깨닫는다. 어, 여기 찾아보니까 이거 인동초네, 인동초!

맞다, 인동초, 인동덩굴. 그 향기가 제법 깊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여기에서도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았었고 변산 숲 속을 걷다가도 발견했던 적이 있다.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잊지 않을 거 같아서 흐뭇해졌다.

시원했다. 우리가 해장을 할 때 맵고 뜨거운 국물을 떠먹으면서 시원하다고 그러는 그 시원함이 있었다. 속이 시원하네, 후련했다. 짝이 맞지 않은 젓가락을 찾아주고 고무신을 옳게 놔주고 단추를 바꿔 채운 듯이 말끔한 것이 속에서 일었다. 그럴 때 나는 말을 한다.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기로 마음먹고 무대에 나온 것처럼 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에서도 문학을 엿볼 수 있다니까. 지금 내가 속이 시원하다고 그랬잖아. 하나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이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써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이야. 누군가는 1+1=2라고 열심히 설명하거든, 그런 식으로 '시원하다'를 말해주려고 애쓰지. 그런데 방금 우리가 했던 것처럼, 저게 무슨 꽃이냐 알아본 것뿐인데 우리도 시원하잖아? 이런 것도 시원하더라, 이거야! 시원하다는 저기 목표점이 있어,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은 아주 많아. 문학이 바로 그 방법만큼이나 각각이고 다종다양하다는 거야. 어쩌면 '이것이 문학이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문학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래서 그런지 자기는 시詩가 어렵다고 그런다. 아내는 그런 게 불만이란다. 다 시詩라고 그러는데 정말 어떤 것은 자기가 봐도 시란다. 이런 게 시詩구나 싶은 것이 있다면 이런 것도 시詩라고 하나? 싶은 것들 사이에서 자신감을 잃는다고 그런다. 그래서 자기는 문학이란 말을 들으면 한편으로 사기술 같다는 생각도 든단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닌가 싶단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문학이라고는 하지 않지, 분명히 우리가 시원하다고 그랬거든, 그거 일종의 카타르시스야. 사람이 뭘 먹는다고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는 않아. 분명히 그럴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이 있거든. 그 조건에 맞아떨어질 때 사람은 무엇인가가 해결되는 것이지, 우리가 시원해진 것처럼.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순간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것이 무엇이든 작품이야. 감정에도 작품이 있고 시간과 장소, 인연, 먹거리, 공부, 활동이 되는 모든 움직임에는 영웅의 순간이 있어, 그 순간에 짠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적이지. 물론 종교인에게는 종교적일 테고 철학자에게는 철학적인 모습이겠지. 그래서 감히 말하는데 창작이라기 말보다 '발견' 같은 말이 더 어울리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 신대륙 발견, 그런 것처럼."

역시 생각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문학 같다면서 이번 생에서는 걷는 것으로 만족하겠단다. 그러면서도 아까 '시원하다'는 것은 알아들었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자기도 알 것 같단다. 어떻게 그렇게 매일 쓰냐고 '나 같은 사람은'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하겠다고 웃기도 한다.

"거기가 그래, 나 같은 사람은 거기 가는 길을 조금 안다고 할까, 그러니까 자꾸 이렇게 저렇게 찾아 나서는 거 같아. 사람들도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그렇잖아. 방법이 방법을 낳잖아. 방법 하나를 알게 되는 데까지 시간과 노력이 드니까, 거기에서 멈춰 있는 것이지. 나도 하다가 마는 것들 많잖아. 적당히 질문하는 것들이 바로 거기 쌓여 있는 질문들이야. 넓지도 않고 깊지도 않고 높지도 않고 많지도 않은 그러나 흐르는. 일단은 흘러야 해. 그래야 어딘가에 닿지. 문학이 여전히 흐르는 그런 거 아니겠어? 사람들은 문학으로 흘러가고 있는 자기들만 보이겠지만 사실 문학도 어딘가를 계속 흘러가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모르는 것이지. 사람이 문학을 모르는 것은 문학이 문학을 모르니까 가능한 거야."

모르는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넓은 차원으로 꺼내 놓고 바라보는 상상을 해보라고 주문했다.

"어쩌면 모르니까 흐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흐르고 있으니까 아직 전부는 아닐 테고, 바다도 우주도 다 시간을 흐르잖아. 그러니까 적당히 아는 척, 아니면 적당히 모르는 척하는 것도 다 문학적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재미있지."

음악을 잠시 꺼두고 황창연 신부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걸었다. 단순히 걷기만 하는데 이렇게 호사를 누린다. 웃으면 복이 오고 걸어도 복이 온다. 신부님이 마침 그러신다. 죄는 게을러서 생긴다고. 낮에 열심히 콩을 삶고 하루 종일 부지런히 뛰어다니면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든다고. 죄지을 시간이 없는데 어디에서 죄를 짓냐고. 웃었지만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잘 안다. 성실하지 못할 때 죄가 생겨나고 죄가 찾아온다.

혼자서 길을 걸을 때 주로 떠오르는 기억들은 내가 잘못한 것들이다. 바꿀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것들이 발에 챈다. 숨이 가빠지는 곳에서도 땀이 흐르는 곳에서도 그 잘못들은 사라질 줄 모른다. 동행한다. 길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내가 잘못한 것들에게 내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잘한 것도 내가 못한 것도 내가 되어 있으니까. 사람은 그래서 행복하고 그래서 괴로운 것 아닌가. 길에 문학이 있고 종교가 있더라는 내 말은 그 뜻이다. 언제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는 편지 말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길을 걸을 때 나는 편지를 쓰는 것 같다. 말로 다 하지 못하는 편지, 내가 쓰지 못하는 문학, 내가 다 고백하지 못하는 종교를 길에서 몸으로 쓰는 것 같다. 그래서 그 길들을 아끼고 보듬고 그리워한다. 내 고해소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목요일 오전 호숫가를 거닐면서 질문들을 생각했다. 내가 할 질문과 내가 받을 질문을 물가 옆에서 천천히 바라봤다. 문학이 묻는다. 너는 문학적이냐. 내가 묻는다. 문학은 인간적이냐. 호수가 물었다. 삶은 슬프더냐. 내가 호수에게 물었다. 꽃이었던 적이 있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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