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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02. 2024

戀人

더할 나위 없이


그는 산골에서 태어나 산골에서 살고 산골에서 죽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았고 말도 못 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했다. 사람 노릇이나 할까 싶었던 그의 어머니는 장가갈 생각은 아예 하지를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산으로 다녔다. 갈 데가 거기밖에 없었다.

그녀는 스물이었다. 충청도 산골에서 전라도 산골로 시집을 왔다. 배곯는 일은 없을 것이니까, 그 한마디 말을 따라 이 골짜기에 찾아들었다. 눈 내리는 雪川은 적막했다. 누가 나 같은 절름발이를 받아줄까, 그날따라 오른 다리가 더 차가웠다. 눈 위에 눈이 쌓였다. 눕고 싶었다. 눈 속에 파묻혀 자고 가면 훨훨 가벼울 것만 같았다.

한 사람은 이쪽 끝에 앉았고 한 사람은 저쪽 끝에 앉아서 방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귀먹고 다리 아픈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말이 없었다. 말없이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밤 사이에 용지미골 맨 꼭대기 허술한 오막살이는 여태 살던 데와 다른 집이 되었다. 낭만이란 말은 낭만을 모르는 이들에게 낭만적이다. 축복이란 말도 행복이란 말도 포근하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이 이날 이때를 살았나 싶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번졌다. 밤이 깊어가면서 눈이 쌓였다. 바람 소리는 차갑고 밖은 얼어붙었다. 하얗게 날이 밝으면 눈세상이었다.

용이 꼬리로 땅을 쓸면서 하늘로 올랐다던 골짜기, 그날부터 용지미골은 그녀의 그릇이 되었다. 거기에 눈물을 담고 한숨을 담고 절망도 담고 무엇이든 잘 담았다. 웃음도 한숨도 사계절도 거기 담았다. 그릇에도 주름이 졌다. 그 그릇을 말끔히 씻어 흙벽에 달고 바람도 쐬고 볕도 쬐면서 스무 살 처녀가 육십 세월을 먹었다. 스물다섯이던 젊은이는 여든다섯을 먹고 떠났다.

몸은 구부정하고 기운이 쇠했어도 할머니를 옆에 앉힌다. 손등이 다 허물어졌다. 그 손으로 부른다. 둘이 늙었다. 한 손이 다른 손 위로 그리고 그 위로 볕이 앉는다. 핏줄만 도톰하게 돋아서 서로를 잇는 모습이 옛날 그림 같다. 살아서 사무치는 저 갈망 너머의 갈망을 어쩌면 좋으냐. 감나무에 감이 흥건했던 지난가을이었다.

더할 나위가 없이,

'연인'

진화, 할머니 이름 송진화, 할아버지 이름 강길동. 이름처럼 살았어, 할아버지가 나를 꽃이라고 했어, 내 이름 진화 眞華, 참꽃. 그래 진달래, 맞아. 달이, 달이 그러면서 나를 불렀어. 달래, 달래 그러던 것이 이 물 없어지니까 달아, 달아 그러더라고. 사람이 우스워, 맨날 그리 불러주면 그리되잖아. 꽃인 양 바라봤어. 할아버지가 산에 가면 산을 바라보고 장에 가면 장 있는 데로 쭉 쳐다보고 밭에 고추 심을 때는 옆에서 이렇게 보고, 아궁이에 불 때고 있으면 어깨만 봐도 좋았지. 잘 때도 보고 깨서도 봤어. 그 서툰 말, 말도 아닌 말로 나를 부르면 그게 달인 거야. 꽃도 되고 하늘에 달도 되고, 나는 내 이름이 그렇게 좋았어. 이 사람이 걸어간 세월은 나였고 내 이름 진화였고, 날마다 달이었고 그때마다 꽃이었어. 나는 어서 늙고 싶었다니까. 감나무에 달이 뜨면 소원처럼 거기 빌었지. 길동이란 이름 석 자를 하늘에다 쓰고 다음에도 다음에도 또 만나게 해 줍소 했다니까. 어디서든 찾을 수만 있게 해달라고 모든 것들에게 빌었다니까. 저 밭 가운데 있는 너럭바위에게도 지날 적마다 쓰다듬으면서 말했네. 우리 할아버지 보내고 가겠다고 말이야.

여름만 덥고 겨울만 추운 줄 알았다. 달래는 길동에게서 사시사철이 덥고 추운 것을 새로 배우느라 자기 삶이 훌쩍 가벼워졌다. 겨울에도 따뜻하고 더운 것이 있어요. 여름에도 시원하고 추운 날이 있다오. 이 물이 말이요, 백강으로 흘러요. 누구는 백강 白江 그러는데 여기 그전부터 살았던 사람들은 설천 雪川이래요, 손님은 뭐가 더 그럴듯한가. 산에 눈이 내려면 저 아래로 하얗게 길이 나요. 물 위에 길이 수북해져서 은근히 수작을 건다니까, 그 길로 쭉 걸으면 어디 딴 세상에 닿을 것 같았으니까. 우리 어머니가 나 시집보내면서 한마디 한 것이 여태 잊히지 않는다니까. 길을 끊고 살라고. 엄마가 하도 보고 싶어서 하염없이 물을 바라봤단다. 엄마 얼굴도 그 물에서 나이를 먹더란다. 그것이 이거였어, 우리 영감님이 늘 한 그릇 떠다 달랬다며 맑은 물, 동치미를 내게 건넨다. 동치미 담글 때마다 한 세월을 보테고 한 세월은 잊었다며, 그러고 사는 거라요. 한 모금만 마실까 했던 것이 다 들어갔다. 내 속으로 한 사람의 생이 꿀떡꿀떡 넘어갔다. 할아버지도 멀리서 웃는 것 같다. 맛이 좀 나지, 그렇지?

할아버지는 사랑을 어디서 배웠을까. 노을 지는 저녁이었다. 곤줄박이가 오래 가지에 앉았다가 날아가는 날이면 무수한 진동이 결을 이루며 골짜기에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때마다 참한 꽃, 예쁜 꽃이 흔들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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