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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l 23. 2024

김민기는 '김민기'

평안한 안식을 빕니다


밤을 걸었다. 덥다는 것은 핑계였고 어디라도 어둠 속이면 좋을 것 같았다. 칠흑 같은 깜깜한 속이 아니라 어슴푸레하니 깊어가는 침침함이 필요했다. 동굴을 찾아 나섰다. 휴대폰 하나만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탔다, 그 말이 씹혔다. 탔는데 내려간다. 타고도 내려가는구나.

별도 없고 달도 없는 여름밤 아래를 어디에서 어디로 걸을까. 자동차 불빛이 없는 데로 걸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아직 차들이 지나는 거리에서 노래가 흘렀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그러면서 김민기의 목소리는 많이 서럽게 들린다. 서러움 모두, 서러움, 거기가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저만치 가서 불러봤지만 그 서러움이 아니었다. 기껏 나 이제 가노라, 끝을 길게 늘였다.

오전에 강화도 사는 이종사촌 형에게 소식을 들었다. 김민기 선배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태극기를 꺼내 조기를 달았다고 그랬다. 그 마음이 보였다. 나는 선배라고 부르지 못하는 형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유명한 서울대 법대 82학번 출신으로 감옥까지 다녀온 형이었으니까. 과녁을 빗나간 화살처럼 학생 운동도 민주화 시위도 가까스로 나를 비켜갔다. 90년대에 대학에 들어간 세대는 86 민주 항쟁을 나중에 스크린으로 감상한다. 불과 10년을 사이에 두고 스무 살 청년들의 삶은 터무니없이 달랐다. 70년대의 김민기는 어느 구석진 방에서 노래를 만들었고 80년대의 사촌 형은 어느 밤길로 도망 다녔을까. 나는 그 사람들이 만든 노래를 듣고 그 사람들이 외친 구호를 이야기로 들으면서 편안하기만 했다. 그래서였을까. 김민기는 언제나 우뚝 서 있는 모습이었고 사촌 형은 희생자 같았다. 저 사람들은 왜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지, 그 모습마저도 지긋이 달래는 듯해서 친해질 수 없었다. 사람이 다르구나. 나와 다른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가수 한대수가 부른 노래를 김민기도 부른다. 한 번은 이렇게 듣고, 한 번은 또 저렇게 들으면서 걸었다. 어떤 사람과 친하게 살다 세상을 떠나면 좋을까. 어떤 사람이 그늘 같은 사람이며 달빛 같은 존재가 될까. 지금은 바람이 불었으면 싶었다.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너머 물결같이 춤추던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 볼래, 지녀 볼래.

걸음을 멈추고 목소리를 쳐다봤다. 가사를 한 글자씩 새겼다. 거기 밑에 어떤 이가 써놓은 말이 핑 눈에 들었다. 우리를 이만큼 살게 해 준 선한 영향력을 잊지 않겠습니다. 영면하세요. 오늘 밤은 나도 여기서 그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밤을 지키고 싶구나. 51년 익산에서 태어난 인연이 그 순간 감사했다. 익산 어딘가에서 태어났을 당신을 축복합니다. 73년 전 당신이 태어난 그 땅을 거닐면서 당신의 그 좋고 멋졌던 삶에 나도 감사합니다. 본 적 없이 살았어도 '김민기'는 늘 '김민기'였습니다. 선생님이었고 예술가였고 어른이었습니다.

어두운 빛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 이름 사람이어라. 오늘은 내내 그 노래를 들었다. 그 이름,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아름다운 사람은 그렇게 이름이 없다. 입으로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마음에 떠오르는 이름인 뜻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것 같다. 아하, 누가 은하수도 보여주면 좋겠네. 아하, 누가 나의 손을 잡아주면 좋겠네. 손은 그렇게 잡아야 하는 것을, 은하수도 그렇게 보여줘야 하는 것을. 아하, 내가 저 들판의 풀잎이면 좋겠네. 시냇가의 돌멩이면 좋겠네.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넉넉한 슬픔입니다. 많이 슬프지 않게, 슬픈 듯만 하게 울리는 일이 여름밤 귀기鬼氣처럼 목덜미를 스칩니다. 잘 지내라는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는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에 찾아가겠습니다. 비가 오는 날 거기를 깨끗하게 닦고 다시 예쁜 붕어 두 마리를 놓아둘까 싶습니다. 새벽 별빛을 타고 숲에 내려와 들러보고 가시면 좋을 듯합니다. 어디에서 그 노래들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든든했었는데····

그 낮고 깊은 목소리로 한 번만 더 듣고 싶습니다.

보라,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많이 고마웠습니다.

평안한 안식을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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