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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l 11. 2024

세상의 모든 음악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저녁이, 어둠이 깃드는 공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견딜 생각이었는데 결국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저쪽을 바라봤어야 했는데 하필 싱크대에 서서 해가 지는 서쪽으로 서 있었다. 온통 '저물고' 있는 것들 앞에서 동공이 흔들렸다. 꾸역꾸역 물을 말아 밥을 먹는 사람처럼 어디에서든 무심하겠다던 다짐이 그 순간 스르르 흘러내렸다. 여름이었을까, 가을이었을까. 왜 그때를 떠올리면 늘 계절이 흔들릴까. 젊음은 시간 때문에 공간이 견디기 힘들고 나처럼 나이가 들면 공간 때문에 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살까, 그 짐을 아직 풀지 않고 한쪽으로 던져 놓은 채 몇 해 동안 맡지 못한 공기와 어색한 재회를 하고 오랜만에 보는 투명한 햇살을 바라보며 며칠간 지난 일들을 돌이켰다. 5년을 떠나 있었는데 하룻밤 꿈을 꾸고 난 기분이었다. 돌아올 곳이 여기가 아니고 돌아올 때가 지금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고서 허둥대지 않았다. 자리 없음, 그것이 내 자리인 것을 수긍했다. 그러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면서 살아도 살아질 것 같았다.

 해가 지는 서쪽으로 달렸다. 나는 너무나 길을 잘 안다. 생각 없이 운전을 해도 어김없이 거기에 닿는다. 해가 지는 곳으로, 바람이 바다와 몸을 섞다가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는 곳으로, '너'를 여기서 만날 줄 정말 몰랐다는 곳으로.

 한껏 불완전했다. 꺼지지도 못하고 타오르지도 못하는 불로 무엇을 밝힐 수 있을까. '언제나 그렇듯 같은 기차를 타고 너는 뒤를 향한 의자에 앉아 있구나.' 체코에 사는 친구가 10년 만에 보낸 메일은 언제나 그렇듯 짧은 '사카즘'이었다. 어떤 것들은 시간과 공간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춤사위를 가진다. 그런 태생이 그런 죽음이 있다. 나는 비로소 영매가 되고 무당이 되고 하늘과 땅, 새싹이나 마른 낙엽이어도 좋다고 눈 내리는 날에 오래 빌었다. 그런 삶도 있다고 전했다.

 흔들리는 언덕에 서서 거기까지 오면서 들었던 '세상의 모든 음악'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그 노래, 그 라디오를 들으면서 살게 될 거 같다고. 바다를 보러 왔던지, 짠 소금 내를 맡으러 왔던지, 아니면 그 바다 위로 빛나는 별이 보고 싶었던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다시 시간이 훌쩍 흐른대도 바위처럼, 새처럼, 하나의 문장처럼 -혹 빛이 바랬을지언정- '너'를 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나왔을까.

 그에게,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덕분에 잘 지냈다는 말도 견디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도 참는다. 수많은 사연을 함께 살았다. 그저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겪어야 할 일들을 만 분의 하나, 백만 분의 일쯤 나도 견뎠다. 그 시절 내가 '세상의 모든 음악'을 얼마나 의지했던가는 여기 한 줄씩 따라 적었던 이야기 하나로 대신한다.

다시 듣고 멈추고 다시 듣고 멈추고, 그러면서 일기처럼 썼던 방송을 다시 돌려준다. 이거야말로 오랜 애청자로서 그리고 사랑이란 말을 어색하게 써보는 한 사람으로서 건넬 수 있는 선물 아닐까 싶다.

- 오래전에 방송을 듣고 따라 적었던 작가의 글이다. 누구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는 방송이 아니라 모두의 이름이 떠오르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다.

소피가 스팅고에게.

스팅고 내 삶의 끝자락에 당신이 나타나 주지 않았다면 나는 삶이 고통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었을 거예요.

당신은 아무것에도 상처받아 본 적이 없는 표정으로 풋풋한 젊음을 안고 어느 날 갑자기 브루클린에 나타났죠. 당신의 그 맑고 선한 표정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나도 당신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고 당신 같은 표정을 갖고 싶었고 누구에게서도 상처받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었죠. 당신이 부러웠어요. 진심으로

스팅고. 당신은 내게 부드러운 사람이면서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었고 찢긴 마음이나마 한 자락 나누고 싶은 연인이었고,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나의 가장 깊은 고통을 보여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이었어요.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아마도 사랑을 초월한 마음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라요. 무엇이든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 내게 상처와 고통을 주지 않을 단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으니까요.

스팅고.

나는 당신의 타자기 소리가 참 좋았어요. 당신의 타자기 소리는 아버지의 타자기 소리를 연상시켰지요. 내 유년기에도 그렇게 행복한 타자기 소리가 들렸던 날이 있었지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피아노 소리와 존경받는 학자였던 아버지의 타자기 소리가 어우러지는 집안에서 자랐으니까요. 내 아버지는 인류의 완벽함을 믿는 분이었어요. 아버지로부터 완벽한 독일어 교육까지 받았던 나는 아버지의 비서 역할도 했어요. 그러다가 아버지의 유태인 말살 계획이 담긴 연설문을 타자기로 치게 된 거죠. 진정한 지성인이라고 믿었던 아버지가 내게 준 충격이 내 생애의 첫 번째 고통이었어요.

당신에게 아버지는 반나치주의였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스팅고 나는 어쩌면 아직도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도 몰라요. 스팅고 당신에게 했던 거짓말은 내가 내 스스로에게 했던 거짓말이기도 해요. 그래서 나는 어떤 것이 현실인지 어떤 것이 거짓말인지 잘 구분이 되질 않아요.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살아요. 그 참혹함을 당신은 알아요? 내 현실을 인정할 수 없고 내가 겪은 일들이 마치 남의 것처럼 아득한 그런 심정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건 내게 더 큰 형벌인지도 모르겠어요. 그 참혹한 것들을 잊으려 노력하면 할수록 신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이 너무 깊었어요. 내 손목에 남긴 자국들, 내 팔목에 새겨진 1133759라는 번호. 그건 내게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겨웠다는 증거예요.

스팅고.

당신은 나와 레이단의 기괴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내가 마치 술기운 떨어진 알코올중독자처럼 레이단을 찾아 헤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겠죠. 레이단이 나를 그토록 괴롭히는데도 레이단의 발소리만 나도 뛰어나가는 나를 당신처럼 정상적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 걸 '상처의 연대'라고 불러도 될까요? 상처를 가진 사람들끼리 알아보는 상처. 그 사람이 나를 괴롭혀도 "그래 이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상처가 나의 상처를 괴롭히는 거야" 하고 눈 질끈 감고 받아들이는 상태를 당신은 결코 이해할 수 없겠죠.

스팅고

나를 구해준 레이단을 광기 속에서 홀로 죽어가게 할 수는 없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또 잃을 수는 없어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요.

당신에게 내 불행한 삶의 그림자를 옮겨놓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상처는 지금까지 나눈 것으로 족해요 당신의 그 순결하고 착한 마음이 내게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는 믿음을 줬다는 것을 기억해요.

스팅고.

역시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레이단과 함께 세상을 저버린 나를 위해 당신은 마지막까지 선물을 주고 있네요.

에밀리 디킨슨의 시.

그 시 정말 좋아요.

이 쓸쓸한 침상 위에

찬란한 빛이 비치게 하라

심판의 새벽이 올 때까지

이 빛나는 아침

이불깃 똑바로 접고

베개를 두둑이 하여

아침 햇살 이외 그 어떤 것도

감히 훼방치 못하게 하리.

스팅고.

나는 간절히 바랬어요.

어느 날 아침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그렇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찾아와서 하루를 사는 일이 별거 아니라고, 힘들지 않고도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날을 간절히 바랬어요. 내 삶에 그런 아침은 없었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그런 아침을 맞이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기대를 갖기에 나는 너무 지쳤고 너무 불행했어요. 당신은 내게 삶보다 죽음이 편하다는 걸 이해해 줄 거예요.

고통이 살아가는 힘이 되어준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희미해져 간다는 것도 하나의 고통이니까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으면서도 스웨덴의 난민 수용소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거예요.

스팅고

그래도 내게 주어진 2년간의 시간 동안 그늘에 잠시 든 햇살처럼 당신의 밝은 마음을 쬐고 갈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아직 순결하고 다정한 당신을 나 정말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라봤어요. 건드리거나 오염시켜서는 안 될 한 송이 꽃으로 말이죠.

안녕, 스팅고

내 슬픔이 당신에게 전염되지 않길 바래요. 내 잠든 표정에서도 느꼈겠지만 나는 이제 홀가분해요. 고통의 심연에서 놓여난 나는 이제 훨훨 날아다닐 거예요. 아무도 내게 어떤 선택도 강요하지 못하도록 훨훨 날아다닐 거예요. 내가 끝끝내 붙들지 못했던 내 딸아이. 엄마가 손을 놓아버려서 비명을 지르며 끌려 가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한 줌의 재가 돼버린 내 딸아이를 만나 꼭 안아줄 거예요.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스팅고

아침 햇살 이외에 아무것도 나를 방해하지 않을 세상으로 갈 거예요.

당신의 소설을 강제로 빼앗아 읽은 레이단이 브루클린 다리 위에 올라가 외친 소리 기억해요? 세상의 많은 작가들 사이에 뜬

또 하나의 별. 스팅고를 환영하노라.

스팅고. 그 말은 레이단의 진심이었고 또 나의 마음이기도 했어요.

스팅고. 당신이 좋은 소설가가 되기를 바래요. 그리고 당신은 행복하고 오래 살기를

- 소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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