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것도 있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아직 내게 남았구나. 어떤 음성은 눈빛이다. 그 순간이었을까. 한 사람의 음성과 눈동자가 고스란히 박제된 것이. 찰칵, 사진처럼 찍었다는 말은 부족해. 레몬 맛이 나는 생크림을 바른 스펀지 케이크였어. 거기 누우면 푹신할 것 같은 잔잔한 한마디, 한마디가 향긋했다면 웃겠다. 다들 웃을 거야. 그 말을 전한다고 할까, 실렸다고 할까. 거기 가을 같은 것이 있었던 거야. 슬픈 것도 있었다며 반짝이는 가을은 처음이었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Jion, 그때 우리는 어떤 세월을 지나던 참이었을까. 그때가 몇 살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허전해서 편지를 쓰다 말고 거울을 본다. 안경을 썼고 코가 반듯했고 윤기가 나는 그의 머리카락이 재미있었다. '항상' 그렇게 다녀요? 브리티시라는 말은 바다, 하늘이란 말처럼 막막한 구석이 있다던 나에게, 한국적인 것은 어떤 것이냐며 빨간 사과를 한 손에 들고 하나도 쉬운 것이 없다던 날. 서쪽 끝 1층 강의실 칠판으로 오렌지빛 햇살이 길게 들어서고 있었다. '막막한' 것을 이야기하느라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Cripple, Crippled*였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니····. 우리는 어쩔 수 없군요. 그다음 방학을 앞두고 강의실 커튼을 다 내리고 침묵 속에서 웃으면서 봤던 '노팅힐'은 이상하게도 서른 살에 죽은 에밀리 브론테를 생각나게 했다. 브리티시, 나에게 브리티시는 아무래도 폭풍의 언덕, 그런데도 거기 가보고 싶은 것은 왜일까. 스무 살을 잘 살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나를 Jion은 친구처럼 바라봤다. 내가 프로페서라고 부르지 않았던 유일한 프로페서 Jion을 생각한다.
Half라는 말이 아름답게 보였다. 절반은 일본인, 절반은 영국인, 나는? 그럼 나는 어떻게 나눠질까. 절반은 어색하고 절반은 견디는 일이 일상이었던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어떤 사람이었던가. 4분의 1은 러시아, 4분의 1은 중국, 4분의 1은 이탈리아 그리고 4분의 1은 남미 대륙 어디쯤 살던 사람이었다고 말하면 얼마나 신기할까.
얇게 금으로 만든 책갈피였다. 마지막일 것 같은 선물을 그에게 보내고 나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늘 떠나고 있다. 30년 전 Jion은 오늘 어느 거리에서 누구에게 '슬픈 것도 있다'라고 지긋하게 바라볼까. 하코다테에서 별을 볼 줄 알았었는데 삶이 젓가락 하나만도 못하는 것 같다며 우리는 웃었다. 무엇이든 이렇게 집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바르고 정갈하며 순한지 모르겠다며 끄덕였다. 그도 나도 젓가락 하나를 오래 바라보며 바닷소리, 바닷소리가 내는 세월 소리를 가만히 착하게 듣고 있었다.
*세월이 가면, 박인환 시
*Crippled, 절름발이의, 불구인, 무능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