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께
귤이 한참 맛있는 시절입니다. 늦은 시간에 하나씩 까먹는 귤이 지금 내가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이 귤 하나가 내는 맛을 만들지 못하잖아. 혼자 말하고 혼자 끄덕이면서 또 하나를 입에 넣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시지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다는 감상을 삶의 모퉁이마다 세워놓는 작업을 저는 성실하게 수행하는 편인 듯합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그렇게 1년이나 성당에 가지 않았으니까, 여러 사람들을 궁금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는 게 그렇듯 한동안은 화제에 올랐던 것들도 금세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일상은 저만치 앞에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뒤처질세라 또 일상을 따라가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그러면서 새로운 날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대부분 일이 생겨서, 몸이 아파서, 돈이 없어서, 하기 싫어서, 몰라서. 등등.
아무 설명이 없으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어 보이는 것 같아서 어떤 말이든 맨 앞에 이렇듯 갖가지 이유를 세워둡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들은 상대를 위한 배려이기 전에 자신을 책임감 없는 사람이나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하나의 보호색을 띱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시키려는 마음이 그 말에 담겨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신호라고 생각됩니다. 약한 존재.
저는 왜 그날 이후로 성당에 나가지 않았을까,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럴 때 설명을 잘해야 이해받을 수 있고, 그래야 다시 원만해질 수 있는데 좀처럼 마땅한 대답을 건져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꼭 하나 말해야 한다면, 아마 이런 느낌과 비슷했던 거 같습니다.
'죽음'
제가 그날 죽고 싶었다는 말도 아니고 죽음을 연습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저 죽음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그다음은 어쩔 것인가. 죽음은 그렇게 무책임하고 당돌하고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억측을 낳고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거나 잊습니다. 그즈음 거의 모든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지냈습니다. 가끔 산에 다니면서 바깥공기를 마시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편안했습니다. 기도는 더 절실해지고 말씀은 거룩해서 손으로 만져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떠나시는 신부님께 청하는 마지막 고백성사입니다.
내가 사람들을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사람으로 변했는가, 따져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부분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산으로 자연으로 다니면서 홀가분했으니까요. 고요하고 적적한 것이 살가워서 거기 푹 빠지고 싶은 날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어려워하는 것을 같이 고민하면서 제가 누리는 즐거움도 만만찮았습니다. 대학에 합격해서 떠나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흐뭇했습니다. 가능한 길을 걸을 때는 성당에 들렀습니다.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살고 저렇게 죽었던 것 같습니다.
철부지 같은 모습이지만 그게 제 부분인 듯합니다. '나그네'가 되고 싶은 거라고 친구들에게 그랬더니 다들 금방 이해를 합니다. 저는 성실한 신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불량하거나 반항적인 신자도 못됩니다. 저는 해찰하는 신자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 본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변명도 이쯤이면 수준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 나 자신을 견딥니다." 에밀 시오랑의 말에 "살면서 죽을 때까지 무엇을 하냐? - 나를 견디고 있어."라고 다시 써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맙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하니 더 고마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에 선 리더는 맨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제일 신경 쓰이기 마련이니까요. '견디는' 일은 누구에게나 지난한 일입니다. 더 견디지 않고 그만 벗어내고 탈탈 털어버리는 것이 새로운 가치가 되어가는 세상이지만 저는 그대로 견디고 싶습니다. 그것도 시나브로 견디고 싶습니다. 천천히 가면 못 가는 데가 없어서 좋다는 시늉을 하지만 천천히 가면 모두 견뎌야 합니다. 쏟아지는 것들, 흔들리는 것들, 가라앉는 것들을 피하지 못합니다. 피하지 못하고 싶습니다. 하느님도 제가 꽤 성가실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늘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신부님들을 만나면서 나이를 먹었습니다. 딱 하나만 기억하라고 그러면 저는 이 장면을 갖고 가겠습니다. 짜장면을 함께 비벼 먹었던 분은 신부님이 유일합니다. 신부님과 했던 짜장면 투어는 제가 했던 최고의 여행 중에 하나로 남을 것입니다. 인연이 허락한다면 풍경 좋은 곳에서 다음에는 제가 만든 짜장면으로 신부님 모시고 싶습니다.
신부님, 어디서든 평온하십시오.
길을 걸으면서 좋은 것 중에 하나는 저절로 주의 기도가 입에서 흘러나오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미사에 빠진 것도 욕한 것도 미워한 것도 모두 걸으면서 빌고 있습니다. 길이 멀수록 잘못한 것들이 잘 떠오릅니다. 저는 그 길을 좋아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바라면서 맺습니다.
2024. 0112. 요셉 드림.